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vu letar Apr 10. 2023

연분홍과 환멸

기억나세요? 그때 나는 연분홍 재킷을 입고 있었어요. 오늘처럼, 바닥에 닿으면 사라져 버리던. 그런 눈이 오던 날이었어요. 당신이나 나나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따라놓고 한 모금 마시고 둘 다 쿨럭댔어요. 나는 몇 번이고 말했죠. 내일 아침엔 첫 출근을 하는 날이아고.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글을, 슬픔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곳이었어요. 몇 년간 연락도 없던 당신은 왜 하필 그날 나를 찾아왔을까요. 나는 단지 당신과 몇 시간만 더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함께 아침을 먹고 그동안 꼭 보고 싶었던 전시회를 같이 보는 일. 당신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죠. 


하지만 다음날 당신은 다른 사람이었어요. 말투도 표정도 같았는데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어요. 그리곤 다른 약속이 있었다며 가버렸습니다. 이 이후는 나만 아는 이야기예요. 많은 사람들을 지나치며 당신을 따라갔어요. 한참을 가니 당신은 해가 아주 잘 드는 테라스에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커피를 마셨어요. 나는 발코니 아래에서 그런 당신을 보며 한참 동안 서있었습니다. 빛 번짐이 심해 온 세상의 색깔이 다 섞여버렸어요. 같은 것을 보며 다른 생각을 했으니 그것은 우리들만의 전시회였습니다.


환멸이라는 단어를 보니 당신이 기억났습니다. 벌써 15년도 더 지났네요. 그때 첫 출근을 했다면 저의 삶은 많이 달랐을까요. 그건 알 수 없죠. 그러나 분명한 건 이제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환멸이라는 단어도 어색한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삶이 우리들에게 자몽을 내밀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