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세요? 그때 나는 연분홍 재킷을 입고 있었어요. 오늘처럼, 바닥에 닿으면 사라져 버리던. 그런 눈이 오던 날이었어요. 당신이나 나나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따라놓고 한 모금 마시고 둘 다 쿨럭댔어요. 나는 몇 번이고 말했죠. 내일 아침엔 첫 출근을 하는 날이아고.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글을, 슬픔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곳이었어요. 몇 년간 연락도 없던 당신은 왜 하필 그날 나를 찾아왔을까요. 나는 단지 당신과 몇 시간만 더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함께 아침을 먹고 그동안 꼭 보고 싶었던 전시회를 같이 보는 일. 당신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죠.
하지만 다음날 당신은 다른 사람이었어요. 말투도 표정도 같았는데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어요. 그리곤 다른 약속이 있었다며 가버렸습니다. 이 이후는 나만 아는 이야기예요. 많은 사람들을 지나치며 당신을 따라갔어요. 한참을 가니 당신은 해가 아주 잘 드는 테라스에 앉아 선글라스를 끼고 커피를 마셨어요. 나는 발코니 아래에서 그런 당신을 보며 한참 동안 서있었습니다. 빛 번짐이 심해 온 세상의 색깔이 다 섞여버렸어요. 같은 것을 보며 다른 생각을 했으니 그것은 우리들만의 전시회였습니다.
환멸이라는 단어를 보니 당신이 기억났습니다. 벌써 15년도 더 지났네요. 그때 첫 출근을 했다면 저의 삶은 많이 달랐을까요. 그건 알 수 없죠. 그러나 분명한 건 이제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는 환멸이라는 단어도 어색한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