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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u letar Oct 17. 2023

다닐 교회가 없어요.

십자가가 많아서 외계인도 침공을 못한다는데, 다닐'만'한 교회는 없다.

사람들이 교회를 많이 떠났다. 그게 무엇 때문일까.

아직도 교회에 붙어있는 사람이라면 그 점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도 아직 교회에 붙어있는 사람 중 하나다. 이른바 종교인.


교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인에 관련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밖에서는 우리를 종교인이라고 부르지만 내부에서는 서로를 '신앙인'이라고 부른다. '신을 앙망하는(바라보는) 자'라는 의미다.


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바라만 보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겠지만, 신앙인에게 신앙이 실제 생활로 번지는 과정은 단순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일방적으로 개인이 원하는 것을 빌기만 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을 바라보고 신 또한 나를 바라보고, 그에게 간구하고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와의 실질적인 교제를 통하여 그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 그를 바라보는 것의 실제이다.

신은 살아있으며, 그의 목적이 있고, 따라서 그가 부여해준 나의 삶이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개인의 행복이 이 종교 활동의 끝이 아니다.  이것이 개신교가 타 종교와 구별되는 점이다.


개신교에서 하는 기도를 경우에 따라 자기 최면, 또는 명상과도 같은 것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개신교에서 하는 기도는 자기 자신 안으로 파고드는 명상과는 차별성이 있다.

답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결정이 아닌 신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며, 자신을 주장하거나 자신이 인정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닌, 하루하루 신의 힘을 입고 완전한 '자기 부인'의 길로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으로 종국엔 '기독교인(그리스도인)' = 신으로부터 기름 부 음을 받은 자가 되는 것. 장소에 국한되지 않으며 자신 자체가 교회 되는 것. 그것이 가능할 때에 비로소, 세상 어딘가에 가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나는 기독교인(그리스도인)인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착각한다. 우리는 신의 마음이 넓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을 너무나 함부로 말한다.



개인주의의 끝에 서있는 나도 언젠가는, 내가 바라던 교회의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다.


어릴 때 다니던 교회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자기의 마음보다 남의 마음에 더욱 초점이 있었으며 요즘 느끼는 고통이나 허무함은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인지 함께 답을 찾았고, 갈증으로 부터 자유를 되찾는. 진짜 신앙은 어떤 것인지 몸소 알렸다. 온정이 있는 목소리로 대화를 청했슬픈 일에 서로 울며 부둥켜안았다.


유감스럽게도 요즘은 그런 교회를 찾기 힘들다.


내가 경험한 교회는 텃새에 질투에 단 한 주도 웃고 있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남을 폄하하고 사회와 마찬가지로 나는 높고 너는 낮다는 구별을 짓고 따돌리고 비웃고 헐뜯고 평가하는 것. 당신은 참 별로라고, 어떻게 해서든 굳이 말해주고 싶어 하는 것. 그저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내세우고 싶은 그것.


늙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내가 이 교회를 10년을 다녔네 20년을 다녔네 하는 소용 없는 소리를 해댄다.


묻고 싶다. 신이 과연, 우리가 이 교회에 몇 년을 다녔는지 관심이 있을까. 이 교회에 처음 온 사람보다 10년 다닌 당신이 신에게 더욱 소중할까.

미안하지만 신이 그런 것으로 사람을 차별할 일은 절대로 없다. 위선으로 봉사하는 천박한 행동에 사람은 속아도 신은 결코 속지 않는다. 개신교는 마일리지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앞장서서 무언가 많은 활동을 했다고 기세등등하다면,

그 언젠가 신의 앞에 엎드렸을 때, 그는 당신과 나를, 아예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내 가족에게 교회에 오라는 소리를 못하고 있다. 교회에 오면, 사람에 질려서 신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까 봐 그렇다. 그저 전에 없이 가족에 성실하게 임할 뿐이다.


신은 사랑 그 자체이다.

내가 남의 사과가 탐이 나서 그  과수원에 수은을 심어도, 그걸 이해할 것은 신밖에 없다. 그는 그런 우리가 불쌍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를 바라보며 이 더러움을 씻겨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사랑 없이 믿음만 강해진 종교인은 무서운 존재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겐 더 이상 사랑이 없다. 그저 무모한, 모종의 믿음만 강해졌을 뿐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다툼만 있을 뿐이다.


오랜만에 다시 교회를 찾거나 처음으로 종교를 가지기 위해 교회를 찾는 사람이라면 이 점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가 생각하던 교회는 이제 거의 없다.


교회에 좋은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더욱 많다. 방송국에 가서 진짜 연예인을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가짜는 많고 진퉁은 보기 어렵다. 그걸 교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가버리지 않기만을 바란다. 어떤 교회는 그저 훈련소의 역할만 하기도 한다. 진짜는 외부에 있다.


신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훈련하고, 그 훈련에 열매를 맺으면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이 되어라 명령했기 때문이다.




나는 소금인가.


내 맛은 짜지 않고 떫다.


나는 누군가를 교회에 나오기 싫게 만들지는 않았나? 누군가가 떠났을때, "저 사람은 신앙이 낮아서 그래."라고 말하 신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는 않았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런 물음 정도는 자신에게 하기를 바란다.


종교생활을 한지 꽤 오래되었지만 오늘에 와서는 내가 진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을 한다.

난 별로다. 난 누군가가 기대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언젠가는 꼭 기독교인이 되리라는 소망만이 내 안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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