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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랑 Feb 01. 2024

공터



어릴 적 나는 친구들과 동네의 한 외진 놀이터에서 자주 놀았다. 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면 탁 트인 전경이 펼쳐지는 비밀스럽고 흥미로운 장소이다. 그곳에서 친구들은 담배를 피기도 했고 그네를 타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그 당시에 소위 말해 '양아치'인 애들과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항상 집 밖에 나와 하릴없이 길거리를 배회했다. 같이 다니는 친구 중에서 '범수'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범수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싸움도 잘하고 게임도 잘하고 리더십도 꽤나 뛰어나 우리들 사이에서 캡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지만 중학생 시절 철없던 내가 보기에는 범수가 참 멋있었다. 나는 범수와 항상 외진 놀이터에 갔다. 범수는 상당한 골초여서 이 구석진 데를 좋아했던 것일 거다. 언제는 나와 단 둘이 놀이터를 간 적이 있었는데 시답잖은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감성이 터져서 그랬는지 서로의 가족사와 인생에 관한 대화를 했다. 진지한 범수의 모습에 나는 놀랐고 그 힘든 상황을 견디는 범수에게 존경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화를 하고 며칠 후에 범수는 강제 전학을 가게 된다. 교실에서 동급생 친구를 폭행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범수는 주변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다. 대장이 사라지고 우리 무리는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 사건 이후로 범수에게 정 떨어진 것과는 별개로 나는 범수가 너무 그리웠다. 은근히 무리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를 챙겨주고 잘 대해줬었는데 범수가 가니까 괜히 쓸쓸했다. 그때의 나는 상당히 감성적인 아이였던지라 가끔 혼자 범수와 같이 갔던 외진 놀이터에 가서 멀리 떠나버린 범수 생각을 했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장소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생겼던 것 같다.



머리가 자라고 범수가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될 무렵 나는 첫사랑을 하게 된다. 사실 첫사랑을 당했다. 예전의 나는 이성과 말하는 것을 꺼려했던지라 나를 항상 졸졸 쫓아오던 그녀는 내게 귀찮고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녀는 완고하였으며 내게 사랑을 표했다. “사귀자.”라는 말은 참 당혹스러운 말이다. 대답 한마디에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거나, 가장 멀고 어색한 사이가 된다. 나는 고백을 받았다. 그래도 멀어지기 싫었다. 사귀는 도중 그녀를 범수와 갔던 놀이터에 한 번 데려간 적이 있다. 놀이터는 그네가 없어지고 공터로 변해버렸다. 아무도 없고 어두운 곳은 이성에 대한 감정을 무르익게 하기에 정말 좋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공터에서 나의 첫 키스마저 훔쳐갔다. 그러나 기분은 당황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설렜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녀에게 급속히 빠지기 시작했다. 사랑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무조건적으로 그녀에게 헌신했다. 그녀가 나를 좋아했던 만큼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내 인생 한쪽에 그녀를 들이고 나서부터 그녀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더 이상 내게 사랑을 쉽게 주지 않았으며 먼저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사랑은 마치 렌츠의 법칙처럼 들어가려고 하면 같은 극의 전류로 밀어내고 나가려고 하면 다른 극의 전류로 붙잡는다. 여전히 좋아하였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았음에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를 떠나보내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녀와 했던 것을 다른 이들과 하고, 그녀와 갔던 공터를 다른 이들과 같이 갔었다. 그러나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녀를 잊기 위해 발악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혼자 공터에 가서 멍하니 서서 담배를 피웠다. 문득 범수 생각이 나서 씁쓸했다. 정작 범수는 이제 담배도 안 피고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산다는데 나는 왜 과거에 머무르고 오히려 퇴보하는 것인지. 슬픈 내 마음과는 달리 앞에 보이는 풍경은 찬란하다. 낮은 건물들 위로 솟아난 아파트들은 마치 거대한 산을 연상케 한다. 아파트 더미를 보고 그곳에 같이 살기로 했던 너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왜냐면 나는 이젠 서울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난 피던 담배를 모래 바닥에 짓이겨 놓고 그 이후로 공터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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