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은 Dec 13. 2022

전화가 왔다

나의 기쁨 우리의 소리#2

30분 이른 아침을 연 금요일. 오전 6시    


삼 프로 TV가 아닌 휴대전화에 녹음된 수궁가를 틀어놓고 냉수 한 컵을 들이켠다. 수궁가 범 내려오는 대목과 토끼화상을 그리는 대목. 복습을 탄탄하게 하고 가야지 그다음 대목을 쉽게 배울 수 있다. 귀는 스피커에 손과 눈은 쌀을 씻은 후 밥을 짓고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트린다. 달그락하는 소리에 한 소절이라도 놓칠세라 청각의 모든 세포가 스피커로 향해있다. 밥상을 차리고 보온병에 물을 채우고 사과와 배를 잘라서 한 통 담고 마스크를 챙기고 한바탕 소란한 아침 풍경을 남긴 후 아이와 남편이 각자의 자리로 떠났다.     



    

별주부전으로도 알려진 수궁가. 고등학교 국어 고전문학에 나왔던 기억이 난다. 순우리말과 한자어, 방언이 섞인 가사를 상세히 뜯어보기는 처음이다. 범 내려오는 대목은 이 날치 밴드가 불러서 화제가 된 노래라 익숙한 음이다. 자라가 용왕을 위해 토끼를 구하러 토끼화상을 들고 수궁 밖으로 나온다. 멀리 토끼가 보여서 토생원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그만 호생원이라고 잘못 불러버렸다. 용맹하고 집채만 한 호랑이의 생김새와 산에서 어슬렁거리며 내려와서 자라 앞에 우뚝 선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다. 전래동화 <호랑이와 곶감>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이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용맹함보다는 오히려 어리숙한 모습으로 작은 동물이나 사람한테 수모를 당한다. 수궁가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생원이라고 불러주니 좋아하는 어리숙하고 꽤 귀여운 면을 가진 호랑이.    

 

청소기를 돌리는 마음이 분주하다.

아, 그래. 12월 마지막 주에 연말 공연을 할 예정이라 했지. 한복 상태를 봐야겠다. ‘내년 공연을 대비한 무대 연습이라 편하게 생각하고 각자 개인 한복을 준비하세요’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법한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 새색시 한복. 옷 정리를 하면서 몇 번이나 정리할까? 마음을 먹었지만, 의미가 있는 옷이라 차마 과감히 버릴 순 없었다. ‘판소리 수업이 얼마나 좋아요. 이 기회에 새색시 한복을 입을 수 있으니. 하마터면 할머니가 될 때까지 못 입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선생님의 허스키한 소리와 반달 눈웃음이 떠올랐다. 한복은 저고리 소매 끝, 동전, 옷고름, 치마, 주름, 얼룩 하나 없는 말끔한 최상의 상태였다. 남들 앞에서 한복 입고 부채를 들고 노래한다는 자신이 낯설고 조금은 호기롭다.     




지난주 금요일은 선생님이 코로나 감염으로 휴강을 해서 어찌나 김 빠진 하루였던지. 빨래통에 마지막 남은 양말 한 짝을 널며 한 대목씩 소리를 따라 부르는데 갑자기 휴대전화에서 나오는 노래가 멈췄다. 액정에 뜬 낯선 전화번호.

“김재은 님이시죠.” 전화기 너머의 다급하고 낯선 목소리는 찰나지만 불길함이 느껴졌다.

“오늘 판소리 수업 휴강입니다. 선생님이 코로나 후유증인지, 아침에 뇌출혈 증상이 있으셔서 응급실에 가시는 중이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수강생 명단을 보니 회원님이 멀리서 수업을 오셔서 헛걸음하실까 봐 급히 전화합니다.”          

‘안 돼요. 선생님. 쓰러지면 안 돼요. 무탈하게 꼭 나으셔야 해요.’ 진심으로 토해낸다. 선생님의 건강을 이토록 간절하게 염려할 줄이야.    

  

막 시작한, 재미에 빠진 흥 오른 수업이 선생님의 건강 이상으로 폐강될까 염려하는 속내이지.






사진출처 픽사 베이

매거진의 이전글 무의식이 흐르는 대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