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은 것이 생각나는 날이 있다. 엄마에게 물어보기 전에 나의 머릿속에서 먹고 싶은 것이 먼저 떠오르는 날. 오늘은 김밥이었다. 나는 참치김밥을 좋아한다. 일반 야채김밥보다는 참치와 마요네즈, 깻잎이 어우러져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깻잎향이 감도는 참치김밥이 내 입맛에 더 맞다. 하지만 엄마는 참치김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표현보다는 멀리하려고 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참치와 같은 대형 어류는 중금속이 많고, 그것을 통조림으로 만들기까지 여러 화학물질이 들어갈 테니 몸에는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엄마는 야채김밥만 먹는다.
나는 참치김밥이 먹고 싶고, 엄마에게는 야채김밥이 좋을 것 같고. 어떻게 타협을 봐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엄마가 TV에 나온 묵은지 김밥을 먹고 싶다고 했었다.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화면에 잡혔던 묵은지 김밥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잘 익은 묵은지를 잘게 잘라서 참기름을 듬뿍 넣고 싹싹 버무린 다음, 깨소금으로 간을 한 고슬고슬한 밥 위에 올리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만 떠오르고 그 외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는 떠오르지가 않았다. 어차피 엄마랑 내가 먹을 것이니 묵은지와 함께 할 나머지 재료는 우리 기준에 맞게 고르고 싶었다. 냉장고를 들여다보니 시들기 시작한 시금치와 얼마 전 엄마가 몸 상태가 좋을 때 만들어 놓은 멸치볶음이 보였다. 시도해 본 적 없는 조합이지만 괜찮지 않을까?
먼저 묵은지를 꺼냈다. 재작년 겨울 즈음 언니의 시어머니께 받은 김치였다. 시원하고 깔끔한 맛의 김치여서 찌개나 볶음으로 먹기 좋았다. 묵은지의 양념을 조금 덜어내고 참기름을 몇 번 두르고 통깨도 좀 넣은 다음 조물조물 무쳐 주었다. 그다음 시금치 무침을 만들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시금치 무침의 최대 난관은 시금치를 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을 씻어도 계속 나오는 흙 알갱이에 질릴 지경이다. 6번을 씻은 끝에 시금치를 데칠 수 있었다. 데친 시금치는 물기를 한번 짜내고 참기름과 소금, 간장, 다진 마늘과 함께 무쳤다. 멸치볶음은 이미 완성된 상태여서 특별히 손댈 것이 없었다. 밥은 적당히 씹히는 맛이 있는 보리밥으로 지었다.
김밥말이 위에 김을 올리고 갓 지은 보리밥을 한 김 식혀서 펼쳐준 다음 묵은지, 시금치, 멸치볶음의 순서로 올려주었다. 재료를 올리고 김밥을 잘 말았는데 가게에서 파는 것처럼 단단하게 말리지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 나 지금 김밥 처음 만드는구나! 그러고 보니 소풍 때도 만든 김밥보다 가게에서 산 김밥을 많이 가져갔었다. 당시 엄마가 일로 바빴던 탓에 김밥을 싸 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해보는 것이니 엉성한 것이 당연했다. 몇 번 더 시도해 봤지만 역시나 계속해서 헐렁한 김밥만 만들고 있었다. 결국 엄마를 호출했다. 무엇이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역시 엄마에게 지원요청을 하는 것이 상책이다.
놀랍게도 엄마는 김밥말이를 착착 휘둘러가며 가게에서 볼 법한 김밥을 줄줄이 말아냈다. 어렸을 때 엄마가 만들어준 김밥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내 착각이었나? 생각보다 엄마가 김밥을 잘 만들어서 좀 놀랐다. 생각해 보면 회사를 다녀서 바빴다고는 하지만 살림만큼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린 적이 없는 엄마였으니 이 정도의 실력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를 너무 우습게 봤다보다. 어쩐지 머쓱해져서 잘 말아놓은 김밥을 열심히 썰었다. 접시에 잘 담아내고 식탁에서 엄마와 함께 먹었다. 묵은지와 시금치, 멸치볶음의 조합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시금치와 밥에는 간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묵은지와 멸치볶음이 짭조름해서 딱 좋은 맛이었다.
엄마랑 같이 만들어서 그런가? 왠지 가게에서 사 먹는 것보다 더 맛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나이가 되어도 엄마 없이는 못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들도, 배워야 할 것들도 더 많아질 텐데.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엄마가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바람이겠지? 불쑥 들이치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내려 김밥을 더 꼭꼭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