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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snow Dec 09. 2022

맛의 풍경

따뜻하여라





찬바람이 불어오니 저녁상에 뜨근한 된장국을 올리고 싶어 멸치와 새우로 국물을 낸다.

아이들의 고운 입에 걸리는 것이 없도록 작은 건더기까지 다 건져낸 후 아이들이 체험에서 만들어온 된장을 크게 한 수 푼 떠내어 끓어오르는 국물 안에 풀어 넣는다.

시원하고 구수한 시금치 된장국을 끓일 참이다.

찬물에 흔들어 씻어낸 시금치를 손으로 뚝뚝 끊어내어 된장을 푼 물에 포근히 끓여 내주면  맛은 

밥상이 허전할 때면 한 번씩 생각나게 만드는 구수함이 된다.

끓어오르는 된장국 색을 보니 평소 마트에서 사서 먹던 된장보다 유난히 색이 짙어 보였다.

시중에 파는 된장은 황토색쯤 이였다면 아이들이 전통 체험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된장은  병의 크기는 작았지만 뭔가 묵직한 무게가 담긴 듯한 짙은 갈색과 깊게 배인 냄새를 흘려내고 있었다.     




끓고 있는 된장국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마루에 걸터앉아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된장찌개를 먹었던 순간이 기억에 물이 들듯 가물거리며 올라왔다.

두꺼운 뚝배기 안에서 아직도 성을 풀지 못하고 무섭게 끓어오르고 있는 된장찌개를 상위에 투박스럽게 올리시며 뚝배기만큼이나 구수하고 뜨끈하게 불러주면 좋으련만 할머니 말의 끝자락에는 마치 떨어지면 안 되는 덩어리 마냥 항상 욕이 붙어서 언니와 나를 부르셨다.

"밥 먹어, 이년들아"

맛있었다. 할머니께서 끓여주신 된장찌개는 드시는 내내 할머니가 뱉으셨던 말처럼 '괴기보다 맛난 맛'이었다.  


나중에 결혼을 하고 첫째를 임신해서 지독한 입덧으로 고생을 할 때,  정말 그때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된장 

맛이 너무 그리울 만큼, 그래서 이제는 요양병원에서 이 빠진 호랑이가 되어 창가만 바라보고 계시는 할머니를 모시고 나와 한 번만 그때의 맛을 맛보게 해달라고 조르고 싶을 만큼,  내 기억에 그 맛은 참으로 맛났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스치는 된장은 맛이 아닌 기억 속에 함께 담겨있던 풍경이다.

마루에 걸터앉아 둥근 철제상 위에서 젓가락을 딸가닥 거리며 할머니와 언니와 내가 셋이 앉아 저녁을 먹었던 그날의 색.

할머니의 이마 주름선 위로 불긋불긋 넓게 퍼져나가던 뜨끈했던 가을의 색.

가을의 색이 저 넘어 흩어지고 있을 때 그 위로 뚝배기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들이 몽글몽글 구름 꽃처럼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참으로 따뜻했던 찰나의 색.

작은 시골집 마루에서 할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를 떠먹으며 할머니 등 뒤로 올려다본 하늘은 유난히도 넓었고 유난히도 붉었다. 살면서 그렇게 넓은 하늘을 또 볼 수 있었던 날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그렇게 아득하게 물드는 하늘의 빛을 또 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 순간 내 어린 삶의 가장 큰 줏대였던 무서운 할머니는 커다란 하늘 아래 그저 작은 배경 하나에 불과했다.




다 끓인 시금치 된장국을 두 아이의 국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리며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자리에 앉혔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들어온 된장이라며 다른 날보다도 더 맛있게 숟가락을 입에 떠 넣으며 예쁘게도 오물거린다.

이 순간을 아이들은 어떤 맛으로 기억하게 될까?

오래된 기억의 자리까지도 닿지 못하는 찰나의 순간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겠지만,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애써 피곤함을 담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누르며 자신들의 이름을 천천히 불러준 엄마의 목소리가 어느 한편에 조용히 스며들기를 바라본다.

아이들의 마음에 부드럽고 따뜻한 빛깔의 작은 배경으로 담기길 바라본다.     


   



* 이미지 출처:  unsplash.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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