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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snow Dec 09. 2022

멀리 계셔 주세요

내 아빠

어린 시절 명절이 돌아오면 할머니의 걸음이 분주해진다.

5일마다 서는 장에서 온갖 좋은 제철 뿌리들과 귀한 시골 음식들을 사다 쟁이느라 연신 장바구니를 채우는 할머니의 손이 풀 싸라기처럼 갈라질 판이었다.

그리고 명절날,

할머니가 그리도 귀히 여기는 금쪽같은 아들들이 온다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작은 아들,

속절없는 네다섯 시간의 귀성길을 참고 달려온 첫째 아들,

내 아빠.


멋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올 때마다 좋은 차를 끌고 와서 마을회관 앞에 당당히 세워놓는 그 모습이, 조용히 나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목소리도.

멀리 있지만, 이렇게 일 년에 두 번 명절에만 만날 수 있는 내 아빠가 어린 내 마음에 더 애틋하고 좋았다.

명절을 쇠고 아빠가 아직 서울에 가지 않은 날, 학교가 끝나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는데  벌써 가버린

빈자리를 보면서 혼자 서러움에 복받쳐 울었어도 그래도 좋았다

내 아빠가.


커가면서 알아버렸다.

결코 삶에 당당하다 말할 수 없는 내 아빠의 부족한 모습들을, 아빠처럼 멋있기만 했던 좋은 차들도 아무 의미 없는 껍데기뿐였다는 것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힘겨움을 핑계 삼아 얼마나 고달프게 했는지를.


결혼을 하고 첫아이 만삭이었을 때 그간의 복받쳤던, 목구멍에 차올랐던 설움을 기댈 수 없는 나의 친정아빠라는 '내 아빠'에게 목구멍에 걸려있는 핏덩이를 뱉어내듯 전화기에 대고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몇 년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세상 참 바람에 쉬이 날아가는 실 한 오라기만도 못하게 이렇게 가벼울 수 있을까.

대나무처럼 곧을 대로 곧아서 어느 마디하나 꺾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할머니는 요양시설에서 내가 간식을 사들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몇 달 전 집안 행사에서 만난 아빠는 느긋한 할아버지가 되어 자신에게 웃어주는 내게 그저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얼마 전 폰으로 시 한 편을 보내왔다. 종종 글을 쓰신다 했다.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들 위로

초저녁부터

후드득  거리며

떨어지는  밤비  소리가

고운님의  눈물같이

하얗게  가슴을 일 때면

아무도  찾을 리  없는

산막의  문턱에  서서

까치발로  오래도록   어두워진

소릿길을  내려다봅니다




나를 아프게 찔렀던 가시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영원히 빠지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가서 사는 내내 나를 아프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나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정신없는 내 삶을 살아가다 돌아보니 그 아프던 가시도 세월의 어느 틈에 녹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빼낼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나의 당찬 삶으로 아픔 녹여내고 있었다


내 아빠,

이제 더 이상 아릴 마음도, 없는 자리에 서러워할 것도 없으니 그저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듯 그렇게 멀리 계셔 주세요.

어린아이를 노모에게 맡기고 돌아서는 당신의 마음도 충분히 고달팠을 테니 이제 각자 선택한 삶에서 그 길 따라 평안히 각자의 남은 몫을 살아내면 될 일이지요.





*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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