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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 Dec 02. 2022

그날의 기억

 “백혈병인 것 같아요. 지금부터 병원에 상주하실 분 계신 가요?” 

 2014년 3월의 달력이 막 넘어가려고 하는 날이었다. 유난히 감기가 길어진다 싶어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의사는 혈액검사 수치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돌을 지나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가만히 있어도 얼굴만 보면 웃음을 짓게 하는 해맑은 아이.

어느 날부터인가 걸음마를 하다 넘어져 생긴 멍이 쉽게 가시지 않을 때도, 머리에 올라오는 반점에 피부과에서 항생제를 받아올 때도, 백혈병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동안 떨리는 손으로 백혈병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아이를 중환자실에 올려 보내고 몰려오는 두통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먹은 게 없어 위액을 게워냈지만 나 살자고 약 먹는 것조차 아이에게 미안했다. 

 ‘너는 지금 생사를 오가고 있는데 이깟 두통에 약을 먹다니..’ 

 눈물이 계속 흘렀다. 엄마 아빠도 없는 중환자실에서 온 몸에 주사 바늘을 꽂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네가 강해야 해. 엄마가 안 아파야 아이를 돌보는 거야. 네 몸 챙기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친정 엄마의 한 마디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일반 병실로 올라온 후 나는 아이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늘 웃는 얼굴로 아이와 의료진을 대했다. 그렇게 해야 아이가 빨리 나을 것 같았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 당시 내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피그말리온이라고 쓰여 있었다. 

 바람 덕분이었는지 골수 이식만이 살 길이었던 아이에게 첫째의 골수가 100프로 일치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친 형제간에도 100프로 골수 일치 가능성은 25프로밖에 안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날이 기억난다. 첫째 혈액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그날도 평범하게 탕비실에서 둘째 우유를 데우고 있었다. 밖은 무더위가 기승을 떨고 있었지만 2014년 여름의 기억은 서늘하고 추운 겨울이었다. 잠든 아이를 병실에 두고 탕비실에서 멍하니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손에 든 휴대폰으로 진동이 느껴진다.

 “어머니! 정원이 형과 골수 일치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100프로 일치예요. 너무 잘 되었어요! 이제 이식 날짜 잡으면 될 것 같아요.”

 허공에 고개를 숙이며 목이 매여 잘 나오지도 않는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조혈모세포 이식까지, 문득 뒤돌아보니 8년의 시간이 훌쩍 흘러 건강하고 장난기 가득한 아이가 내 앞에 있다. 






누군가에게 평범함은 지루함이라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나에게 평범함은 행복함이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들을 쫑알거리고 늦잠 자는 아이를 간지럼으로 깨우며 반찬 투정하는 아이를 달래고 먹이는 이 평범한 일상들이 좋다. 그리고 이 평범함은 우리 가족이 똘똘 뭉쳐 이루어낸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기적의 싹을 틔워준 동생에게 골수를 준 큰아들, 대구에서 서울까지 한 달에 몇 번씩을 오가며 나와 아이들을 챙겼던 남편,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허전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첫째를 키워주신 시어머님, 딸 좋아하는 반찬을 배낭에 이고지고 전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주말마다 병원에 오셨던 우리 엄마. 이 긴 마라톤에서 우리는 한 팀이었다.




 


이식 후, 4년이 흘러 둘째의 치료 종결을 앞두고 셋째가 태어났다.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삼형제 엄마가 된 것이다.

 삼형제 육아가 고되다고 느낄 때면 나는 그 날을 떠올린다. 중환자실에서 온 몸이 퉁퉁 부은 채 힘겹게 숨 쉬던 그 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아암 병실로 올라와 엄마를 향해 미소 짓던 그 날, 첫째와 골수가 일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울었던 그 날, 무균실에서 걸음마를 다시 시작해 결국은 걸어서 퇴원 했던 그 날. 그 날들을 떠올리면 어지럽던 내 마음이 정돈이 된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 다가올 내일 보다 지나간 어제가 더 기억나고 그립다. 과거지향적인 잉여인간이 되어 버린 것 같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날들이 기억 속에 남이 있기 때문에 힘내서 오늘을 살아간다. 이제는 추억처럼 되어 버린 내 인생의 소중한 그 날들을 삼키며 삼형제와 뜨겁게 오늘을 또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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