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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Nov 17. 2022

보이스 테라피

                “나의 목소리를 찾아서-당신의 목소리는 진정한 당신의 목소리일까요? 

                           태어날 때와는 다른 지금의 목소리에 만족하시나요?” 


 보이스 테라피 안내 메일을 읽는 순간 잠깐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목소리에 대한 그런 질문도 생경했지만, 내 목소리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걸 알아채면서 충격이 컸다.


 ‘몸에서 나는 소리에 대해서 어떻게 만족, 불만족을 얘기할 수 있다는 거지? 나는 왜 내 목소리를 만족스러워하지 않을까? 새소리 나 바람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 사물들의 소리, 사람의 목소리까지, 소리들은 인간이 의문을 던질 대상이 아니지 않을까?’ 


 내 목소리가 싫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럼 도대체 누구 목소리가 좋은데?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목소리는 싫어도 가족이든, 성우든, 가수든 좋은 목소리가 있을법한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세상에! 갑자기 목소리가 뭔지도 모호했다. 자기 목소리를 싫어하다니 너무 황당했다. 보이스 테라피에 꼭 참가해야겠다는 조급함이 생겼다. 당장에라도 문의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겨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씩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휴가를 내서라도 참석하고 싶었다. 내 목소리가 왜 싫은지, 어떤 목소리를 갖고 싶은지를 알고 싶은 절박함을 담아 꼭 참석하고 싶으니 대기자 명단에라도 올려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회사에 어떻게 휴가 신청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내가 맡은 사업이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업무에 차질이 없게 하고 워크샵에 참석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15명을 모집하는데 조회수는 100건이 넘었고, 참가자 모집 글이 올라온 지는 이미 5일이 지나있었다. 정원이 찼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한 번 더 메일을 보냈다. "진정한 당신의 목소리"라는 문구의 난해함에 사로잡혀 있으며, 동화 속 인어처럼 목소리를 잃어버릴 것만 같으니 꼭 워크샵에 참석해서 이런 나의 혼란스러움을 풀어내고 싶다고 썼다. 

 자정 무렵부터 동이 터오는 시간까지 목소리가 무엇인지, 나의 목소리는 무엇이며, 진정한 목소리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후끈거렸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열기가 사위어들면서 워크샵에 참석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틀 후에 워크샵 참석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거듭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도저히 대직자를 구하지 못해서 첫날 결석하고 말았다. 그렇게 참석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고 빌어놓고 첫날부터 결석이라니…. 문자메시지로 결석한 이유를 설명하고 첫날 어떤 수업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소리 내는 나의 몸 그리기'를 했다고 했다. 

 내 몸이 소리를 낸다? 흥미로운 발상이었다. 나는 머뭇거림 없이 쓱쓱 욕설을 내뱉는 새빨간 입술을 그리고, 빨간 손톱을 드러내고 할퀼 듯 분노하는 손을 그렸다. 내 마음속에 갈등과 화,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두 번째 워크샵에 다녀왔다. 강사는 사람의 목소리를 보이스라고 하지 사운드라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과 분리시킴으로써 문명사회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만들어왔을 것이다. 원시인이 몸통에서 나는 소리를 냈다면 현대인은 사회적인 억압과 개인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목소리가 작다고 윽박지름을 당하기도 했고 말이 많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고 시끄럽다고 눈총을 받기도 했다. 또 탐관오리를 혼쭐 내는 사극 배우에게 매료되어 우렁찬 목소리로 대사를 따라 하기도 했다. 나의 목소리는 타인의 평가와 훈육과 타자의 시선을 내재화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목소리는 뼈와 살과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통의 소리라기보다 욕망과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 좋아하는 목소리를 찾았다. 소주는 됫병으로 마시고 여든여덟의 나이에도 갯벌에서 바지락을 긁는 이모의 목소리다. 생김새에 잘 어울리는 걸걸하고 투박한 목소리, 보이스라기보다 사운드에 가까운 소리다.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년 만에 거는 전화이면서도 넉살 좋게 내가 얼마나 이모를 사랑하는지 아느냐고 아양을 떤다. 


 “뭐? 이모를 사랑해? 난 너를 딸로 생각한다!”


 그 말 한마디 하고 전화를 뚝 끊는다. 역시 이모다. 말과 삶이 일관되게 투박하다. 좋아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떠오른다. 비음이거나 고음이거나 탁성이지만 자기만의 멋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 드디어 내 목소리를 찾는 여행의 문이 열렸다. 내 목소리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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