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 소설일 수도, 독후감일 수도 있는 글쓰기
당신은 누군가에게 쫓기듯 퇴근길을 재촉한다. 눈이 온 뒤 갑자기 추워진 탓도 있었다. 7호선은 유난히 지하 깊숙이 있어서, 당신은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을 우러러보며 짧은 한숨을 짓는다. 고집스레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무겁게 어깨를 파고들어 야속한 고동색 가죽가방을 재빨리 열어서 뜨개 장갑을 찾아 낀다. 겨울 공기에 버석하게 마른 피부를 훑으며 어렵사리 손가락 부분이 끼워졌지만 손가락 사이는 어색하게 들떠 있어서, 당신은 손깍지를 하며 장갑을 마저 끼운다.
아앗! 장갑 안쪽에 닿자마자 오른 엄지 끝이 칼에 벤 것처럼 쓰라리다. 손톱 주변으로 피부가 다 들고일어났는데, 오늘 회의 시간 팀장의 비난을 들으며 당신 자신도 모르게 다 뜯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당신 자신만 모르는 버릇일 수도 있다.) 빌어먹을, 아마도 손톱 아래 상처에 장갑 실밥 뭉치가 파고든 것 같다. 어서 집에 가서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야지, 생각하면서 당신은 마스크를 콧잔등으로 끌어올린 후 마스크 코 부분의 철사를 눌러 얼굴에 밀착시킨다. 마스크가 들뜬 채로 지상에 나가면, 코 부분으로 뿜어져 나온 입김이 찬 공기에 닿으면서 속눈썹에 송골송골 맺혀 성가실 테니까.
당신은 현관문 앞에 서 있다. 쿠팡한테 문자를 받기는 했지만, 청회색 비닐봉지 안에 들어있을 등산양말 다섯 켤레가 불청객처럼 여겨진다. 저 봉투를 들고 들어갈 힘이 남아있을까, 그냥 들어간 후 좀 쉬면 다시 문 밖에 나올 힘이 날까, 그게 더 귀찮을까...... 봉투를 뜯고, 사이즈가 잘 맞는지 신어보고, 그걸 다시 벗고, 상표를 떼고, 포장지를 분리수거해서 버리고, 양말을 세탁기에 넣고, 그걸 다른 빨랫감들과 함께 넣고 세탁을 실행시키는 자신을 그려보느라, 당신은 집에 돌아온 기쁨과 안도를 누리지 못한다.
분명히 스마트폰 터치가 되는 장갑이라고 했는데, 제길, 버튼이 계속 안 눌러진다. 집 밖에서 피를 보기 싫어 장갑을 낀 채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그만 다섯 번을 틀렸고, 1분을 기다려야 한다. 당신은 쿠팡 봉투를 노려본다. 사무실 난방이 약해서 발가락이 시리기에 도톰한 양말이 필요했고, 세 개의 다른 후보와 끝까지 견줘보다가 이 놈을 골랐고, 내 돈을 내고 내가 시켰고, 분명 그땐 설렜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짐스러울까. 별로 필요가 없던 물건을 탐했던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물욕이 많을까. 통장 잔고도 별로 없으면서, 등등의 생각을 했는데도 아직 25초가 남았다.
당신은 상처를 최대한 보호하며 장갑을 벗고, 신중하게 비밀번호를 눌렀고, 신발장 거울 앞에서 휴,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피 맺힌 엄지와 멀쩡한 다른 손가락으로 택배 봉투 끝을 잡아 올려 벗은 신발 옆에 털썩 내려놓고 벽을 더듬어 조명을 켰다. 저 양말은 내일 신어봐야겠어, 생각한다. 씻는 것마저 귀찮다.
외투를 벗으니 집 안의 온기가 스며들며 동시에 엄청난 허기가 몰려온다. 신라면을 냄비째 후루룩 후루룩 들이마시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차려진다. 젓가락을 넣어 기대어 둔 빈 냄비를 아무렇게나 물려두고, 식탁 한편에 있던 그림책을 끌어당겨 포장 비닐을 벗겨내기로 한다. 냄비에서 젓가락 한 짝을 꺼내, 쓰던 휴지에 쓱 닦은 후 젓가락 끝으로 비닐을 찔러 모서리부터 뜯어낸다. 봉투 째 사흘간 식탁에 모셔져 있던 책이 봉인해제된다. 그래도 받자마자 택배 박스는 뜯었잖아, 변명하며 오늘은 제발 미루지 말고 펴 보기나 하자고 당신은 생각한다.
책 속의 소녀가 만나자마자 "난 밖으로 나갈래,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라고 말을 건네며 신발을 신는다. 미안하지만, 난 집에 온 지 삼십 분도 안 됐그든. 오늘은 앉아서 구경만 해도 되겠니, 니가 어딜 가는지?라고 당신이 혼잣말을 한다. 도톰한 표지를, 검붉은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가슬한 손가락 끝으로 비비며 생각한다.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었지, 당신은 생각한다. 표지, 면지, 내지의 질감과 두께가 모두 다르다. 면지는 두장이나 썼고, 엠보에 금박 인쇄된 표지 안쪽에 면지를 붙여서 깔끔하게 양면 처리했고, 책날개에도 종이를 넉넉히 썼다. 종이 이름도, 인쇄용어도 꽤 많이 알았었는데, 종이를 만지는 게 천직일 거라 생각했는데, 당신은 생각한다.
책 속 소녀는 자신이 아끼는 인형상자를 부끄러워했다. 인형상자를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소녀는 인형상자 문을 닫았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부정하는 것이 소녀가 인형상자 앞에서 차릴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언젠가 더 큰 목소리로 떳떳이 인형상자를 내 보이면서, 오늘의 부끄러움을 덮어볼 수도 있으리라.
당신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인형놀이를 한다는 게 부끄러웠다. 이모들이 준 용돈을 엄마 몰래 차곡차곡 모아서 핑크 드레스 입은 갈색 머리 미미를 살 수 있게 된 날, 얼마나 기쁘고 설렜는지. 다섯 살 어린 사촌 동생에게 '소희'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당신은 가까운 이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생각했었다.
그 시절이 지금처럼 총천연색의 욕망을 드러내도 되는 때였다면, 당신은 생각한다. 공부를 곧잘 하지 않았다면, 잘하지도 못하는 수학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시간에 글을 썼다면, 미술 선생님이 콩쿠르에 도전해 보라거나 미술을 전공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해 주었다면, 외동딸이어서 학비 부담이 적었더라면, 할아버지가 배를 만드는 바닷사람이 아니고 나무 조각을 하는 예술가였다면 등등 빛바랜 가정문을 줄줄이 꺼내본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정법은 여전히 필요하다. 미래 시제라는 점만 다르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 사는 로또가 딱 한 번만 대박 나 준다면, 국민연금 수익률이 쭉쭉 올라준다면, 어디선가 뿅 하고 나타난 현자가 우리나라를 이끌어 준다면, 내년 협상 때 연봉이 100%만 올라준다면...... 그림책을 읽은 후 가정문을 몇 개 보탰다.
- 내가 만든 틀이 나 혼자 만든 것이라면, 내 힘으로 깰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은 라면 냄비를 설거지하기 위해 끙, 하며 식탁을 짚고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