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파비앙이라는 프랑스인이 한국사 시험을 보는 과정이 나왔다. 외국인이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시험까지 보려는 열정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번 해볼까'
그 프로그램이 동기가 되어 도전해보자라는 마음이 일었다.
인터넷서점에서 책부터 주문했다. 하지만 해 본 놈이 한다고. 공부를 끊은 지 오래됐던 터라 쉽지 않았다. (아이들한테 공부 안 한다는 핀잔은 안 줘야겠다.) 일단 책은 샀지만, 몇 번 하다가 금방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시간 나면 하자'
그렇게 파비앙은 기억 속으로 희미해지며, 한국사 책은 책장으로 들어가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기다려야 했다.
작년 말쯤, 책장 정리를 하다가 박아둔 한국사 책이 눈에 띄었다. 공부를 했다고 하기엔 너무 깨끗한 책을 보며 양심이 찔렸다. 아이들 문제집 사놓고 안 푼다고 혼냈었는데 결국 나도 똑같았다.
'다시 한번 해볼까?'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자'
먼저 합격 후기부터 찾아봤다. 합격 후기 몇 개를 읽어보니, 잘하면 첫 시험에 바로 1급을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그래, 40대 아줌마도 할 수 있단 말이지'
이번엔 전략을 잘 짜야한다. 지난번 해내지 못했던 것은 구체적인 계획인 없었기 때문이다. 축구에도 전략이 필요하듯 시험도 그렇다.
합격 후기를 보니 한 달 공부한 사람, 2주 공부한 사람, 심지어 2박 3일 공부했단 사람도 있었다.
한 달을 목표로 2주는 강의를 다 듣고, 2주는 기출문제 풀이를 꼼꼼히 하는 계획을 세웠다. 감사하게도 유튜브에는 무료로 들을 수 있는 한국사 강의가 많았다. 그중에 유명한 일타강사의 강의를 선택해서 구석기부터 근현대까지 한 번 쭉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최태성 선생님 강의가 재미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설거지를 하거나 걷기 운동을 할 때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라디오처럼 강의를 틀어놓고 살았다. 그렇게 강의를 3번 반복해서 들으니 이제야 좀 알겠다 싶었다. 학교 다닐 때 이렇게 공부했으면 엄마 잔소리를 안 들었을 텐데.
세끼 끼니때를 빼면 놀고 있는 6인용 식탁은 나의 넓은 책상이 된다. 하지만 오픈된 장소이니 단점도 있다.
식탁의자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으면, 물 마시려던 남편이 묻는다.
"근데 그거 왜 하는 거야?"
"그냥 하는 거야"
냉장고 문을 열던 아들도 물어본다.
"엄마 한국사 공부 왜 하는 거야?"
"그냥 하는 거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지도 승진을 위해 한국사 자격증이 필요하지도 않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시킨 사람도 없고 안 한다고 혼내는 사람도 없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이건 해내고 싶은 나와의 약속이었다.
시험날, 느낌이 좋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고사장을 빠져나와 바로 가채점을 했다.
87점. 아... 아까비. 막판에 고친 문제가 틀렸다. 안 그랬음 90점인데 역시 고치면 틀리는 건 진리이다.
그리고 대망의 점수 발표날 1급 합격증을 받았다. 한 달의 노력, 뭔가 해낸 기분이다. A4 종이 한 장을 들고 뿌듯해했다. 일면식 없지만 동기부여 해준 파비앙이 고마웠다.
"파비앙 씨 고마워요"
뭐하나 내 맘대로 되는 일 없어 자존감이 점점 꺼지고 있을 때 자격증은 나를 일으키는 또 하나의 활력소가 된다.
약속을 지켰다는 자신을 향한 기특한 마음은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기운이 된다.
"대부분 사람은 기운으로 사는 게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린 의기소침한 누군가에게 '기운 좀 내'라고 말하지만, 정작 삶을 이끄는 것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이 아닐까 싶어요." - 이기주 산문집 '한때 소중했던 것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