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기억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적 일은 여섯 살 때쯤 잔치 상차림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간 것이다. 아버지는 잔치나 제사상차림을 잘하셔서 인근 세 개 부락의 잔치상은 모두 아버지 담당이었을 정도였다. 밤, 대추, 곶감, 전 등을 빙 둘러가며 위로 30cm 이상 반듯하게 고여 올린 상차림은 내 눈에도 가히 예술이었다. 내가 살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 덕현리의 한 마을로 40 내지 50호 정도 가구가 있었는데 대부분 전주 이 씨들이었다. 아버지에게 상차림 요청이 들어오면 농번기 땐 어머니가 바쁘시니 아버지를 따라다녔다. 잔치집에서 내어 준 방에서 아버지는 정성스레 고임을 만드시고 나는 천자문을 외곤 했다. 지나가시던 집안 아저씨들이 아버지 옆에 앉아 하루 종일 천자문을 외우는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이 녀석 참 신통한 놈일세. 어린놈이 먹을 것 달라 소리 한 번 안 하고 글만 외우고 있네 그려.”
예닐곱 살 때는 아침에 눈 뜨면 밥을 먹고 애를 업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바로 아래 남동생이 병으로 죽고 여섯 살 아래 여동생을 등에 업고 다녔다. 그 밑으로 여동생이 두 명이나 더 태어났으니 몇 년 동안 잘 때를 빼고 내 등에는 항상 여동생이 업혀 있었다. 아기를 등에서 내려놓으면 다시 업혀 줄 사람이 없어서 아기가 등에 업힌 채로 쉬를 하거나 응가를 해도 옷이 젖은 채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기가 울면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젖 먹이러 어머니가 일하고 계시는 밭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실 때에야 잠시나마 기지개도 켜고 허리 운동도 할 수 있었다. 다시 젖은 채로 아기를 업고 집으로 돌아와 있으면 점심 식사를 하러 오신 어머니가 젖은 아기 옷을 갈아입히고 다시 업혀주셨다. 막내를 업고 다닐 때는 서너 살 먹은 동생들 손을 잡고 밭으로 가는데 다리가 아프다고 징징거리면 길가에서 장금이나 싱아 줄기를 꺾어서 손에 쥐어 주곤 했다.
봄이면 들판에 먹을 만한 것들이 제법 있었는데 장금이와 싱아가 흔했다. 장금이는 30cm 정도 줄기가 올라와 끝에 노란 꽃이 피는데 줄기 속이 비어 있지만 단 맛이 났다. 장금이를 꺾으면 하얀 진이 나와서 많이 먹으면 진이 묻어 입술이 까매져 우스운 꼴이 되곤 했다. 싱아는 줄기를 꺾어서 껍질을 벗겨 먹었는데 새큼하지만 연해서 가장 먹을 만했다. 밭에 가면 싱아가 큰 포기로 서너 포기 있었는데 줄기를 꺾으면 새 줄기가 또 나오곤 해서 간식거리가 없던 그 시절에 요긴한 먹을거리였다. 그 외에 뱀딸기, 산딸기도 종종 따 먹었다. 길가의 고욤나무와 감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와 오디도 자주 먹을 수는 없었지만 맛있는 별식이었다. 사과는 제삿날이나 잔칫날 한쪽씩 나눠 먹는 흔치 않은 과일이었는데 내가 많이 아팠을 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나를 위해 사다 주셨다. 그 시절 사과는 지금 볼 수 있는 보통 사과의 두 배 정도 크기로 황주 사과가 맛있기로 유명했다. 사과나무 세 그루를 가지고 있으면 먹고살 만하고, 열 그루를 가지고 있으면 부잣집이라고 할 정도로 귀한 과일이었다.
우리 집에서 바다까지는 5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바다 일을 위험하게 여기셔서 농사를 주업으로 했다. 논이 1천 평, 밭이 4천 평쯤 되는 농사일로 넉넉하진 못했지만 밥은 굶지 않았다. 열 살 때만 마을에 큰 흉년이 들어 고구마 녹말로 개떡을 쪄먹은 기억이 있다. 흉년이 들어도 고구마 농사는 잘 되어서 팔뚝만 한 고구마를 오십에서 백가마니는 거두었다.
굶지 않을 정도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논머리에 있던 샘 덕분이었는데 흉년이 들던 해 근방에 샘이 다 말랐어도 우리 샘은 마르지 않아 농사에도 쓰고 집에도 길어다 쓸 수 있었다. 희한한 것은 그 샘 한가운데 풍년초라는 풀이 있었는데 가을이 되면 없어졌다가 봄이 되면 가느다란 풀이 올라와 샘 안에 퍼지곤 했다. 풍년 때면 풀이 무성해서 바가지로 풀을 밀치고 물을 떠야 할 정도였고 흉년 때는 풀이 듬성듬성 나 있어서 샘의 풀만 봐도 그 해 농사를 예측할 수 있었다.
샘 주위에 판판한 돌을 놓고 빨래터도 만들었다. 샘은 1m 50cm 정도 깊이였는데 물이 얼마나 맑은지 샘 아래가 다 들여다 보였다. 일 년에 두 번은 물이 썩지 않도록 샘에서 물을 퍼내고 안에 있는 돌들을 깨끗이 닦아냈다. 이 샘의 물을 우리는 숫물이라 불렀다. 암물은 샘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그 물은 불순물 없이 맑긴 했지만 우유를 푼 것처럼 뿌옇게 보였다.
샘 아래쪽으로 이어진 논둑은 아래 논과 2m 정도 차이가 났는데, 논둑에 크기가 비슷한 구렁이 구멍이 여남은 개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논에 가셨다가 딱 한 번 구렁이를 보셨다고 했다. 길이는 길지 않은데 통통하고 비늘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데 신기한 것은 뱀 머리에 귀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나는 논둑을 지날 때마다 갑자기 구렁이가 나타날까 무섭기도 하고 한 번쯤 보고 싶기도 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곁눈으로 논둑을 훑곤 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아무도 구렁이를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