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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13. 2022

소년, 강선 (3)

공부해서 좋겄다, 좋겄다

3년 안에 달리면 병이 재발할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에 고대하던 입학은 저만치 물러섰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리가 넘었는데, 두 고개나 넘어야 했다. 아침을 먹고 달려가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데 뛰면 안 된다고 하니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집에 있게 된 나는 여동생 셋을 업어 키웠다. 동생을 업고 혼자 놀기가 심심해 뒷집 서당에 매일 놀러 갔다. 뜰에 앉아 안에서 책 읽는 소리를 듣다 보니 글 읽는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맞출 수 있었다. 훈장님은 3일에 한 번씩 배운 걸 외우고 쓰라고 시켰다. 여름날이었다. 날이 더우니 문을 열어놓고 시험을 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외우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니까 훈장님이 종아리를 때리면서 "이 놈아 그것도 못 외우냐"며 호통을 치셨다. 뜰에 앉아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었더니 훈장님이 “너는 왜 웃느냐?” 물으셨다.

“나는 할 수 있는데…”

마침 훈장님 친구분이 문 있는 쪽에 앉았다가 내 소리를 듣더니 "얘 한 번 시켜 봅시다" 했다.

"네가 정말 할 수 있겠냐?"

"그 까이꺼 못 해요?"

"그럼 들어와 해 보거라."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하면서 거침없이 천자문 한 권을 다 외우니까 훈장님이 감탄하셨다.

"너는 배우지도 않았는데 천자문 한 권을 어떻게 다 외웠느냐?”

“매일 뜰에 앉아서 선생님이 가르치실 때 계속 따라 했습니다.”

“허, 이 놈이 공부할 놈인데. 이런 놈을 공부시켜야 하는데 애나 보고 있으니 니 아버지가 알면 기가 막히겠구나. 이렇게 좋은 머리를 묻어 두니 참으로 안타깝다.”


서당 @Google


어느 날은 바다에 놀러 갔다. 갯벌에 들어가서 고기도 잡고 꽃게도 잡으며 친구들과 참 재미있게 놀았다. 바다에서 나와서 밭둑에 다니며 딸기도 따먹고 장금도 꺾어 먹었다. 밭 한쪽에는 묘가 셋이 있었는데 묘와 밭 사이에서 말벌 구멍을 찾았다. 서당에 가서 말벌집 이야기를 했더니 형들이 꿀을 캐 먹자며 삽이랑 연장을 가지고 가서 벌을 죽이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니까 어디서 인지 말벌 떼가 몰려왔다. 황급히 도망가다가 예닐곱 명이 말벌에 쏘였다. 이튿날 벌 쏘인 사람은 전부 다 서당에 나오지 못했다. 3일간 못 나온 형들이 몇 명 있었고, 5일 동안 나오지 못한 형들도 있었다. 그 후 형들이 오기가 나서 매일 점심시간에 가서 말벌을 괴롭혔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벌이 엄청나게 많이 나와 웅웅대더니 맨 나중에 여왕벌이 나왔다. 여왕벌이 날아가자 벌들이 그 뒤를 떼 지어 날아간 후에 벌집을 파 보았다. 벌집 크기가 솥뚜껑만 하고 3층으로 되어 있는데 꿀은 하나도 없고 애벌레만 가득했다. 허탕이었다.




놀이는 주로 농한기에 할 수 있었다. 못 치기 놀이는 쇠못 10cm 정도 되는 것을 땅에 손으로 던지듯이 박는 놀이다. 박힌 못을 넘어뜨리면서 자기 못을 박으면 넘어진 못을 따는 것이다. 상대방이 내 못을 넘어뜨리지 못하면 상대방 못이 내 것이 된다. 못이 귀해서 가끔 하는 놀이였다. 주로 한 놀이는 구슬치기였다. 푸르스름한 곱돌을 망치로 톡톡 치면 모가 부서지면서 동그랗게 된다. 내가 그걸 잘 깎았다. 구슬을 주먹만 하게 만들기도 하고, 작은 밤알만 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치기는 나무막대를 20~25cm쯤 되게 만들어서 마당에 놓고 긴 막대로 친다. 이때, 위로 솟아오르는 나무막대를 멀리 치는 사람이 이긴다. 이기면 구슬을 받거나, 쇠못을 받거나, 그냥 재미로 하기도 한다.


연날리기 @핀터레스트



겨울에는 썰매 타기도 한다. 통나무를 삼각형으로 깎고 위에 송판을 얹어 썰매를 만든다. 썰매 날은 철사를 삼각형 밑에 대어 만든다. 삼각형을 잘 만들어야 썰매가 잘 나간다.

연날리기도 빠질 수 없다. 방패연을 주로 날리는데 연줄은 칡넝쿨 껍데기 벗긴 걸 가늘게 찢어 꼬아서 만든다. 연을 만드는 종이는 일 년에 한 번 문에 한지를 바를 때 남은 걸 졸라서 받아 둔다. 연대는 대나무를 얇게 잘라서 만든다. 무명 걸레에 밥을 넣어 찧어서 완전히 으깨 차지게 되면 연대에 바르는 풀로 쓴다. 아버지가 신경 써 주는 집은 민어부레풀을 쓴다. 연줄에 사기를 빻아 가루로 만들어 민어부레풀에 개어서 실에 묻히면 연싸움에서 다 이긴다. 하지만 이런 술수를 쓰면 처음엔 몰라서 질지언정 다음엔 연싸움에 껴주지 않는다.




바닷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망둥어는 낚시질로 잡는다. 대나무같이 긴 나무에 실을 묶고 그 끝에 낚싯바늘을 단다. 철사를 구부려 끝을 뾰족하게 갈아 만든 낚싯바늘은 고기가 빠져나가기 쉬워 고기잡이하는 집에 가서 얻어오는 게 가장 좋다. 미끼는 지렁이를 쓴다. 퇴비장에 가서 흙 있는 곳을 들추면 지렁이가 버글버글했다. 바구니로 잡는 방법도 있다. 소쿠리처럼 싸리를 엮어서 폭은 좁고 길게 만들어 물이 들어온 바위에 올려놓는다. 물이 빠지고 나서 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면 그만이다. 사실 망둥어는 별 맛이 없다. 장대가 살이 꼬들꼬들하고 단단해서 맛있다. 하지만 등에 침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한 번 쏘이면 독 때문에 부어오르고 저려서 한참 고생한다. 길쭉한 밴댕이, 붕어 비슷한 별떼미인가 하는 물고기도 있었다. 숭어는 가물치와 비슷한 것이 국을 끓이면 기름이 동동 뜨고 맛있었다. 물고기를 잡으면 소금 뿌려 구워 먹기도 하고 국도 끓여 먹고, 고추장을 찍어 먹기도 하고, 삶아서도 먹고 신이 났다.


갯벌 @Google


갯벌에서는 조개와 게를 잡았다. 조개는 늦봄에, 게는 여름에 많이 잡는다. 썰물이 되면 물 얕은 곳으로 게가 온다. 범게는 둥그름하고 누르스름하게 생겼다. 바와지는 바위틈에 사는데 붉은색이고, 앞발 두 개가 꽃게보다 큰데 몸은 작다. 갯벌에서 거품이 올라오는 곳을 파면 조개가 호미에 따라 올라온다. 막조개, 동조개, 대합, 바지락 등 한 지게나 캐오는 사람도 있다. 동조개는 많이 나오는 밭이 있어 어떤 집은 가마니로 캐 오기도 했다. 유일하게 돈 안 들이고 구해 오는 반찬거리였다.




낮에 오달지게 놀고 오면 해가 넘어가자마자 잠이 들었다. 어른들은 저녁일을 위해 등잔에 호롱불을 켰다. 석유는 먼데 가서 사 와야 하니 들기름이나 아주까리기름 같이 집에서 나는 기름으로 불을 밝혔다. 제사나 장례식에만 남포등을 켰다. 가을이 다가오면 호롱불 아래 집집마다 가마니 짜는 틀 앞에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느라 어른들은 밤에도 분주했다.  


호롱불 @Google



학교에 가 봤던 건 큰 형이 국민학교 6학년 때 가을 운동회날이었다. 도시락을 갖다 주라는 어머니 심부름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조밥을 주로 먹었는데 유기 밥그릇에 밥을 넣고 그 위에 장아찌와 고추장을 고 뚜껑을 덮어 망에 넣어 들고 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보잘것없는 도시락을 싸 온 아이들은 창피해서 책상 밑에 들어가 앉아 보자기를 쓰고 먹었다고 한다. 학교는 나무 기둥을 세우고 송판으로 벽을 만들었는데 교실 바닥은 마루였다. 학교를 들어서며 ‘여기 댕기는 사람은 공부해서 좋겄다, 좋겄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장에서는 달리기도 하고 선생님들끼리도 씨름 대회를 하고 있었다. 큰 형님 담임 선생님이 1등을 했다. 왁자지껄 응원하는 틈에 서 있다 보니 아는 사람도 없이 외로운 마음이 들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동묘지를 지나고 개울을 건너고 큰 고개 넘어서 길가에 코스모스를 손으로 훑으며 천자문을 외면서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었다.


드디어 3년이 지났다. 이제 13살, 학교를 못 보냈으니 서당에서 한문 공부라도 시켜주마 아버지가 약속하셨다. 가을 농사가 끝나면 서당에 다니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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