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과 대기실이 편안해지기까지
처음 엄마와 집 근처의 작은 정신의학과를 들렀을 때, 그때는 처음이라 정신과라는 병원이 어색하고 긴장하게 되는 공간이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대학 병원 정신의학과에 갔을 때도 환자 대기실 풍경이 낯설고 생경했다.
대기실에 있는 수많은 환자들은 내가 보기에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환자라니 저마다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싶었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분들은 노인 우울증일까 저 젊고 예쁘장한 아가씨는 무엇이 힘들어 이곳에 와있을까.
그저 생경하고 신기했다. 엄마와 일 년 가까이 병원을 들락거리니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사람들이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어느새 이 공간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마는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것처럼 약효과가 나타나며 그토록 스스로와 모두를 힘들게 하던 우울감과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온전히 엄마 혼자만의 힘이 아닌 약의 도움이 크다는 것이 분명했는데 어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은혜를 또 받은 것인지 엄마는 잘 먹고 있던 그 약들을 하루아침에 중단해 버렸다. 그 후로 시간이 지나며 엄마의 신경에 혼선이 생겨버린 것이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던 엄마가 갑자기 가슴이 떨리고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했을 때 또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처음인 양 엄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고맙게도 마음대로 약을 끊어버린 엄마를 혼내진 않았다. 내 속마음은 선생님이 좀 쓴소리로 엄마를 혼내주길 바라고 찾은 병원이었는데 말이다.
그저 다정한 말투로 다시 약을 잘 챙겨 먹을 것을,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약과 멀어지게 될 것이라며 어린아이를 대하듯 차분히 일러줬다.
엄마의 욕심과 충동적인 행동들로 우리 모두에게 겪어보지 못한 시련이 닥쳤고 이 계기로 준비도 못한 채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나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니니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알고 있었지만 예상 시점보다 빨리 와버렸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 가족이 겪은 이 정도의 일은 작은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도 있을 텐데 고통은 상대적인 것인가 보다.
나에게는 일련의 이런 사건들이 작은 일로 생각하며 감내하기에 어려운 일이었다.
그 와중에 내 가슴에 더 비수를 꽂으며 상처를 남긴 사람은 아빠였다.
금전적 사기도 당하고 여기저기 아프다는 곳도 많아 여러 가족 힘들게 했던 엄마가 아니라 그런 엄마를 온전히 이해해주지 못한 아빠였다.
아빠랑 대적해 싸울 의욕도 없었고 나이 많은 아빠의 생각을 내가 바꿔놓을 자신도 없었다.
이 부분은 분명 오랫동안 상처로 남겠지만 인간은 또 망각의 동물이니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레 희석되길 바란다.
엄마의 병세가 다시 시작됐을 때 겨우 일상의 제자리를 찾았던 동생과 이모까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힘들어했다. 나도 못지않게 힘들었지만 내색할 틈도 없었다.
가족들 한 명 한 명 멘탈 케어를 해주는 상황이 돼버렸다.
내 멘탈은 누가 케어해 주나 헛웃음이 날 정도의 여유도 생겨버렸다.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대체 그 시간을 무슨 정신으로 버텼을까 떠올려보니 내 원가족이 나를 버티게 했다.
내 아이와 남편, 두 사람이 없었다면 나 역시 매일이 고통이고 지옥이었을 것이다.
자라나는 내 아이의 밝고 순수한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내 곁에서 내가 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챙겨준 남편이 있었기에 그 순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당연했고 그 당연한 일상의 시간도 있었기에 버텨졌었다.
한참 동생이 엄마 일로 힘들어할 때 내게 전화를 걸어 한탄을 했다.
누나는 힘들어도 매형도 있고 자식도 있지 않냐고 나는 아무도 없다고.
아직 가정을 꾸리지 않은 동생에겐 시련의 시간에 버팀목은 엄마였는데 그런 엄마가 무너졌으니 나보다 더 힘든 게 당연했을 것이다. 그 자리는 내가 채워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자리였다.
주치의 선생님 당부를 새겨들은 엄마는 다시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두세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예전의 엄마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분명 괜찮다가도 한 번씩 후회와 자책이 휘몰아쳤을 텐데 그래도 엄마는 살아내고 버텨내고 있었다.
그런 엄마에게 우연히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친정 가까운 곳에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별도의 교육을 해주는 교육청 산하 기관의 외국인 학교가 생긴 것이다.
그곳에서 교내 환경 담당자를 채용하고 있었고 엄마는 용기를 내어 이력서를 작성했다.
엄마가 직접 키보드를 두드리며 작성한 자기소개서의 일부.
저는 30여 년간 행정 공무직에 몸담아 일했습니다.
긴 직장 생활을 잘 마무리 지었고 남은 노년에 제가 필요한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평생의 직장 생활을 해낸 성실함이 있고 학교에서 마주칠 아이들을 제 손주처럼 바라봐줄 수 있는 할머니의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매일 아침 동네 뒷산을 다니며 다져진 체력도 있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면 학교를 내 집처럼 깨끗이 쓸고 닦으며 늘 빛이 나게 만들고 한국이 낯선 아이들이 이곳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정을 붙이는 과정에 작은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65세를 지나며 취업뽀개기에 성공했고 2년 가까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교육 시설에 출근 중이다. 아이들 등교 전 먼저 가서 교실과 화장실을 쓸고 닦고 아이들이 하교하면 다시 그 자리를 아침처럼 만들어 놓는 일. 나와 통화하며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아이들과 소통을 했던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엄마다.
브런치에 개인사, 그것도 좋은 일도 아닌 가족의 고통의 시간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그 시간을 쉽게 잊어버려 없었던 일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려운 시간을 보내며 깨닫고 느낀 것들이 많은데 그 감정들을 온전한 글로 정리하기에 한참 부족한 제 글솜씨가 원망스럽습니다.
감사하게도 제 글을 읽으며 그래서 엄마는 지금 어떠신지 안부도 묻고 너무 힘드셨을 것 같다는 말들로 엄마와 저를 위로해 주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부끄럽고도 감사했지요.
이 시간을 보내며 제 원가족의 힘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저에게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웃음이 끊기지 않게 옆에 있었고 묵묵히 제가 해내지 못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도와주고 다 지나갈 일이라며 같은 마음으로 위로해 준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직 가정을 꾸리지 않은 미혼의 동생이 처음으로 측은하고 안타깝던 시간들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이런 일을 같이 감당해야 하는 올케가 아직 없었다는 사실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싶습니다.
친자매와도 같은 두 친구 또한 제 곁에서 같이 눈물 흘려주고 위로해 주고 제 마음이 되어 엄마도 같이 원망해 주다가 결국 엄마는 아무 잘못이 없는 분이라는 걸 알게 해 줬습니다. 내 친구들이니까 무조건 내 편에서 내 마음이 되어주며 친정 엄마와 보내는 주말이 힘들 때 제 아이를 데려가 놀아주며 시간을 보내주고 아무나 해줄 수 없는 마음과 행동으로 제가 그 시간들을 잘 견디게 해 주었습니다. 친구들에겐 고맙다는 말로도 부족해 어떤 표현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엄마와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엄마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에 배우자의 든든한 위로가 따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엄마는 아빠보다 자식들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고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희는 유독 더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모녀지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겪으며 나에게 절대적이었고 큰 나무였던 엄마가 원망스럽고 밉고 이해도 되지 않고 연락도 하기 싫은 시간을 길게 보냈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는 지혜로운 방법을 몰랐던 저는 그 시간을 온전히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싫었고 어디라도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그냥 내 엄마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엄마가 이러라고 저를 키우진 않은 것 같은데 저는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웠는지 엄마를 위로하는 척, 보호하는 척, 감싸주는 척하는 위선을 떨며 온갖 나쁜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세상 힘든 척은 다 하고 지냈지만 제일 힘들었을 엄마는 결국 스스로 늪에서 빠져나왔고 온전히 당신만의 그 신념으로 버티고 이겨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저는 요란스럽기만 했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버티고 나와준 엄마가 그저 고맙고 감사합니다.
바보 같은 엄마는 분명 딸인 제가 당신을 외면한 순간을 느꼈고 알고 있을 텐데도 저에게 변함이 없습니다. 전처럼 아침 출근길에 안부를 묻고 손주와의 짧은 통화도 크게 기뻐하고 언제 집에 내려올 수 있니, 하며 다정하게 묻습니다. 한 번쯤 나쁜 계집애! 너 엄마 힘들 때 내 맘도 모르고 엄마에게 짜증 내고 귀찮아했지! 내가 널 그렇게 키웠니?! 너 같은 것도 딸이라고 키운 내가 등신이지! 라며 악담을 퍼부어도 시원찮을 텐데 엄마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목소리로 늘 아끼는 사람을 대하듯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이 지나니 이제야 눈물이 납니다.
우리 엄마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