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자리를 사수하라
아이가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서 열린 음악회에 초대받아 다녀왔다.
낮과 저녁으로 두 번 나뉘어 진행된 음악회였다. 원장님은 저녁 시간에 학원 연주홀이 더 꽉 채워졌다며 기쁘고 흥분된 말투로 진행을 시작하셨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곳 피아노 학원 원장님은 정말 감사한 분이다. 원비만 받고 정해진 레슨 시간에 지도만 해도 될 텐데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더 즐겁게 다닐까, 어떤 이벤트를 하면 동기 부여가 되어 아이들이 피아노를 즐길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시는 게 느껴졌다.
이번 작은 음악회도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수고를 감내하며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부모들은 안다. 내 아이가 대단한 실력자가 아니어도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는 내 아이의 연주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귀하고 감사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어릴 적 피아노 학원을 꽤 오래 다녔다. 여섯 살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어린 나이에 배우고 싶어 학원에 갔을 리 없고 순전히 워킹맘인 엄마의 퇴근시간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엄마가 근무했던 직장 옆에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아직도 이름이 기억난다. 소리샘 피아노 학원. 유치원 하원을 하면 피아노 학원에 갔다. 물론 나도 싫진 않았다. 피아노 학원에서 이론을 배우며 한글을 뗐던 기억이 난다. 바이엘로 시작해 지루한 하논, 체르니, 소나티네, 재즈곡집까지 남들 배우는 순서대로 꾸준히 배웠다.
일하는 엄마도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레슨이 끝나는 시간은 5시도 채 안 됐지만 원장님의 배려로 엄마 퇴근 시간까지 피아노 학원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이론 노트를 몇 번 더 써가며 시간을 때우느라 한글을 익힌 것 같다. 그것도 모르는 우리 엄마는 내가 여섯 살에 한글을 알아서 뗀 줄 알고 꽤나 똑똑한 아이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나도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 연주회를 경험했다. 지역 문화 회관을 대관해 꽤 크게 진행됐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열린 연주회였다. 우리 엄마는 늘 바빴다. 지방 행정직 공무원이었고 동사무소에 근무했으니 크고 작은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나도 피아노 연주회에서 예쁜 드레스를 입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줄 여력이 없었다. 다행히 친자식처럼 아껴주는 고모가 있었고 고모는 바쁜 엄마 대신 남대문 시장에서 연주회 복장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준비해 주셨다. 또, 남다른 패션 감각이 있어서 블랙 드레스를 준비해 주셨는데 그때 사진은 3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다.
연주회 당일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집에 있다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연주회장으로 직접 오는 동선이었다. 난 집에 준비시켜 줄 엄마가 없으니 할머니가 챙겨주신 옷 꾸러미를 들고 평소처럼 피아노 학원으로 갔다. 원장님은 나를 의자에 앉혀 연주회용 화장을 해주셨다. 다른 여자 아이들도 못해도 립스틱 정도는 바르고 올 테니 원장님이 엄마 대신 나를 챙겨주셨다. 양 볼에는 파우더로 톡톡 두드려주고 눈을 감아보라고 하면 눈두덩이에 아이섀도가 칠해졌고 입술을 내밀어 보라 하면 시뻘건 립스틱이 칠해졌다. 고데기로 머리도 예쁘게 말아주셨다. 거울 속에 변해가는 내 모습이 공주님 비슷해지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던 것 같다. 원장님께 화장을 받으며 우리 엄마는 오늘 내 연주회를 알고 있을까 걱정이 됐다. 날짜는 알고 있을 텐데 엄마가 제시간에 와 내 연주 순서를 볼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다. 잠시동안 행복했던 마음이 불안으로 바뀌었다. 원장님과 함께 연주회장으로 갔고 난생처음 관객석이 있고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큰 무대를 봤다. 몇 달간 내가 준비한 곡은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열 살에 연주한 그 곡은 마흔이 다되어가는 지금도 손이 기억을 한다.
내 순서가 됐고 연습한 대로 실수 없이 연주를 했다. 연습하면서 객석에 아빠가 와 앉아 있는 것은 본 거 같은데 내 연주를 엄마가 봤을까 궁금했다. 원생 모두가 함께한 합주 연주를 끝으로 순서가 마무리 됐다. 겉옷을 챙겨 입고 나가는데 엄마가 꽃다발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눈물이 나는 이 마음이 열 살 때 그 마음인 걸까 아님 내가 엄마가 된 마음인 걸까. 엄마는 당연히 내 연주를 봤을 것이다. 사실 내 연주를 봤는지 묻지도 않았다. 엄마가 온 사실만으로 너무 행복했고 기대도 못했던 엄마의 꽃다발까지 받았으니 그 어린 나이에 충분히 행복했다. 아빠가 가져온 필름 카메라로 가족사진도 찍고 엄마가 원장님께 감사 인사를 했던 것을 끝으로 그날 피아노 연주회에 대한 내 기억은 끝이다.
이번 아이의 연주회에 늦지 않으려고 출근 시점부터 긴장 상태였다. 아이가 오프닝 연주를 맡았다고 했다. 반드시 시작 시간 전 도착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종일 분주하게 움직인 덕에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했고 피아노 학원의 작은 홀에 마련된 좌석 맨 앞자리를 사수했다. 내 마음속 임윤찬 피아니스트보다 더 뛰어난 아이의 오프닝 연주를 1열 직관할 수 있었다. 리듬감 있고 경쾌한 곡을 연주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어서 눈물이 쏙 들어가길 바랐는데 이미 감당 불가였다. 아이에 대한 기특함과 감동의 마음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열 살에 내가 떠올랐다. 우리 아이 나이였을 즈음 경험했던 나의 첫 피아노 연주회 말이다. 아이의 피아노 연주를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하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때의 내가 왜 생각이 나서 눈물 버튼이 켜진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아이에게 엄마가 늦어 본인 연주를 못 보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엄마가 일등으로 도착할 거라고 당부해 두었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오래도록 기억될 우리의 행복한 겨울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