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6시, 늦게 잠들었어도 어김없이 눈이 떠지는 시각.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갑자기 귓가에 임영웅 노래가 들린다. 엄마가 틀었냐고. 아니. 내 입에서 임영웅 노래가 자동으로 재생된다. 나만 그러냐고. 아니 아니. 뚱이는 춤까지 춘다.
엄마는 이런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딸 둘이 임영웅의 매력을 알아가는 것이 못내 뿌듯한 표정이다.
콘서트의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차에 올라타서도 연신 흥얼흥얼. 영시 어머님들은 뚱이와 나의 흥얼거림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신다. 두 딸내미가 어젯밤 입덕이라도 했나 궁금하신 눈치다.
이 순간은 뚱이도 나도 이 차 안의 영시다.
요 며칠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더니 그새 코가 맹맹해졌다. 감기? 코로나? 마스크를 다시 써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대신 옷을 4겹이나 껴입었다. 이게 바로 헐리웃 패션. 춥다 추워. 누가 LA는 봄, 가을이라 그랬나.
관광은 이미 멀리 떠났고, 영시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늘 밤에 있을 '마지막 콘서트'다.
이 사실을 간파한 흐흐흐 가이드는 어머님들을 조용히 시간 때우기용 아웃렛으로 데려갔다.
날도 따뜻하겠다. 영웅님도 만났겠다. 한 층 더 신이 난 어머님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 삼매경에 빠진다. 중저가 아웃렛이라 그런지 소소하게 살 것이 많아 보인다. 뚱이는 어느새 통역을 하며 부쩍 친해진 영시언니들의 쇼핑 가이드가 되어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덥석 올라탄 여행, 20년을 그리워한 친구를 만났고, 기대하던 영웅님도 만났다. 그리고 오늘, 이곳 LA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반 고흐'를 만났다. 마지막 관광지였던 게티뮤지엄, 이곳에 고흐 그림이 있을 줄이야.
고흐 작품을 찾아 나서는 뚱이와 나의 발걸음이 바쁘다. 미로 같은 미술관 안에서 고흐를 찾는다는 것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찾는 것만큼이나 벅찬 느낌이다. 뱅글뱅글 돌아 인상파 화가의 방에 들어서니 역시 그의 그림 앞에 구름 떼 같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생전, 단 한 작품도 팔지 못했다는 그, 지금은 그의 그림 한 점이 이 미술관을 먹여 살리는 중이다.
일요일 저녁 헐리웃 거리는 쌀쌀했다. 6시에 시작하는 마지막 콘서트 이외에는 더 이상의 일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설상가상 일요일 티켓을 구하지 못한 뚱이와 나는 그 시각, 헐리웃 거리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헐리웃 스타의 거리는 짧았다. 그 짧은 길 양옆이 잘 꾸며진 영화세트장인양 북적거렸다. 진정한 자유여행자가 된 3시간 우리는 그 거리를 쏘다녔다. 어떤 언니는 바닥에 누워 잠을 잔다. 아까는 그림을 그리고 있더니 어느새 이불을 펴고 잠을 잔다. 어떤 이는 스파이더맨으로 분장해 사진 찍는 일을 하던데, 이 언니는 이 거리가 제 집 안방인 것 마냥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는다. 이방인인 뚱이와 나만 쳐다볼 뿐이다.
내일이면 LA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남아있는 달러를 다 써버려야 할 것 같았다. 우선 봐두었던 가게에 들러 주섬주섬 기념품을 챙기기 시작했다. 쌀쌀한 날씨 탓에 부쩍 추워하는 뚱이는 캘리포니아 로고가 박힌 후드티를 사 입었다. 3벌에 15달러, 쌈지막한 그래픽 티셔츠도 몇 벌 담았다. 냉장고에 붙여 둘 마그네틱을 신중하게 고르고, LA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깨질지도 모를 머그컵을 담았다. 머그컵을 고르니 어느새 접시까지 손에 들려있다. 뚱이야. 우리 10년 차 주부 맞구나.
추운데 쇼핑까지 하려니 고역이었다. 안 되겠어. 따뜻한 까페에라도 들어가 몸을 녹이자.
콘서트도 거의 끝나갈 무렵, 한 까페에 들어서니 언제 추웠냐는 듯 훈훈한 바람이 금세 몸을 녹여준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어, 그런데 저분은? 영웅님 유튜버로 유명한 59TV님? 별나사 노래자랑을 계기로 엄마와 가끔 카톡을 주고받으시는 아주 유명한 유튜버. 엄마 집에 가면 유튜브로 자주 본 적이 있어선지, 아는 분을 만난 느낌이다. 인사할까 말까.
"안녕하세요. 59TV님. 전 000님 딸이에요.^^"
"아~000님~따님, 반가워요."
반가움에 잠시 대화를 나눈 우리는 곧이은 까페 마감시간에 밖으로 쫓겨났다. 애꿎은 커피만 덩그러니 두 손에 남겨진 채 말이다.
"여기는 가게들이 참 문을 일찍 닫아요."
59TV님이 말씀하신다.
맞다. 몸 좀 녹이고 싶은데 녹일 곳이 없다. 술을 한 잔 하러 갈 수도 없고 말이다.
"혹시 여기 레드까펫 계단에서 기념사진 찍으셨어요?"
"아뇨. 여기가 거기예요?"
"네~ 안 찍으셨으면 찍어드릴게요."
"아~ 고마워요."
이렇게 시작된 기념사진 찍어주기는 기생충 스팟을 지나 영웅님 포스터 앞까지 계속되었다. 이미 이틀째 헐리우드에 있게 된 뚱이와 나는 사진 잘 나오는 핫 스팟 정도는 꾀고 있는 이방인이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는 것, 이 또한 여행의 묘미.
콘서트가 끝날 시간인데도 영시들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이라 길어지나 보다. 신청곡을 더 많이 불러주나 보다. 그나저나 가게문은 다 닫았고 밖은 너무 춥고 갈 곳이 없다. 버스에 가보자. 지금쯤이면 와 있을 거야.
종일 버스를 탄다고 투덜거렸던 마음은 이제 버스가 호텔보다 편하고, 헐리웃 거리보다 포근하게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십여분을 기다리자 영시어머님들이 단체로 들어오신다. 오늘도 여전히 흥분의 도가니다.
"오늘 콘서트 안 봤다고? 오늘은 어제랑 완전히 달랐어! 신청곡을 하나도 안 빼고 다 불러줬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뚱이와 내가 마지막 콘서트를 보지 않았다고 하니, 아쉬움에 한 마디씩 건네시는 영웅시대 어머님들이다.
한 주를 마감하는 일요일밤. 이 여행의 마침표, LA콘서트가 끝난 밤이기도 했다.
콘서트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지만,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방을 싸야 했다. 다행히 배고플까 봐 가이드가 준비해 둔 김밥을 먹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