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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Feb 09. 2024

개미군단

명절 연휴 전날의 병원은 어떤 모습일까. 람이 많을까. 아님 예상외로 적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환자들이 까만 개미군단처럼 앉아 있다. 아. 많구나. 일찍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 전에는 진료를 볼 수 있는 건가. 볼 수 있겠지. 그 순간 나도 까만 개미군단에 합류한다.


괜찮아. 나는 읽어야 할 책이 있으니까. 한 시간 반을 기다려도 괜찮아. 오히려 이 시간에 책을 읽으니 더 좋아.


참 이상하다. 병원엔 늘 사람이 많고 나는 내 차례를 기다리고 그 시간은 으레 한 시간이 넘어가고 그 정도 시간이면 뚝딱 책을 읽어낼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읽은 문장으로 돌아가고 다시 돌아간다. 그러다 보면 대기자명단순서와 무심히 틀어놓은 티비 화면에 눈이 간다.


제일 흥미로운 건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이름이다. 대기자 명단에 있는 이름을 보는 게 취미 아닌 취미가 되었다. 내 이름은 언제 뜨나 눈 빠지게 기다리며 다른 사람 이름을 훔쳐보는 시간.


어디 보자 오늘은 어떤 분들이 오셨나. 예전엔 백공주님이 오셔서 공주님 얼굴 한 번 보고 싶어 이리저리 눈을 굴렸는데 오늘은 왕년 연예인 이름을 가진 분이 두 분이나 보인다. 간호사가 계속해서 불러대는 강수지 님. 아. 하늘하늘 그 강수지 님은 어디 계실까.


계속해서 대기자 명단을 눈으로 훑는데 오랜만에 반가운 이름 우희진 님도 보인다. 우희진. 줄리엣의 대명사 올리비아핫세를 닮은 우희진 님. 잘 고 있을까. 참 예뻤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티비를 보는데 그곳엔 평소 잘 보지 않는 정치뉴스가 한창이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와야 정치뉴스를 보는 것 같다. 누군가 뇌물을 수수했다고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알고 보니 우리 지역 의원이다.


아. 나는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책을 읽어야지... 내 이름이 대기자 명단에 뜨고 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마음이 조급해진다. 한 글자라도 더 읽고 진료를 보고 싶은데. 집중해야지... 해야지...


집중을 해야 했다. 나에겐 대기시간 1시간 30분이 있었고 그 시간이면 충분히 많은 양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고작 3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시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명절 전 진료를 받고 싶은 사람들. 며칠 동안 병원이 쉬니 물밀듯 들어오는 사람들은 점심 이후 진료명단에 이름을 적고 사라진다. 2시 이후 대기자 명단이 17명을 넘어간다. 


세상엔 왜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을까. 어느 병원이나 사람이 넘쳐난다. 가끔 다니던 병원을 일주일에 한 번씩 6개월을 다니다 보니 이젠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오래 병원에 다녀도 되는 걸까 싶지만 다리나 허리가 아픈 어른들은 끈질기게 병원에 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건가.


나이는 들어가고 아픈 곳은 늘어나고 멀게만 느껴지던  병원에 더 자주 가게 되고 이젠 병원이 낯설지 않고. 끊고 싶지만 내 맘대로 끊을 수 없는 곳. 노인이 더 많아진다는 훗날엔 이런 모습이 일상이 되려나.


걷기와 채식생활을 6개월째 하고 있다. 6개월이면 완벽한 습관이 될 줄 알았는데 현실에선 용암이 분출하듯 억눌러 왔던 욕망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인간은 편안함과 달콤함 앞에서 본능적으로 약한 존재인가.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한 없이 약해지는 나를 본다.


명절이니까 조금만 풀어질까. 개미군단에 매번 합류하는 일은 꽤나 피곤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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