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 전날의 병원은 어떤 모습일까. 사람이 많을까. 아님 예상외로 적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환자들이 까만 개미군단처럼 앉아 있다. 아. 많구나. 일찍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 전에는 진료를 볼 수 있는 건가. 볼 수 있겠지. 그 순간 나도 까만 개미군단에 합류한다.
괜찮아. 나는 읽어야 할 책이 있으니까. 한 시간 반을 기다려도 괜찮아. 오히려 이 시간에 책을 읽으니 더 좋아.
참 이상하다. 병원엔 늘 사람이 많고 나는 내 차례를 기다리고 그 시간은 으레 한 시간이 넘어가고 그 정도 시간이면 뚝딱 책을 읽어낼 것 같은데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읽은 문장으로 돌아가고 다시 돌아간다. 그러다 보면 대기자명단순서와 무심히 틀어놓은 티비 화면에 눈이 간다.
제일 흥미로운 건 알지도 못하는 남의 이름이다. 대기자 명단에 있는 이름을 보는 게 취미 아닌 취미가 되었다. 내 이름은 언제 뜨나 눈 빠지게 기다리며 다른 사람 이름을 훔쳐보는 시간.
어디 보자 오늘은 어떤 분들이 오셨나. 예전엔 백공주님이 오셔서 공주님 얼굴 한 번 보고 싶어 이리저리 눈을 굴렸는데 오늘은 왕년 연예인 이름을 가진 분이 두 분이나 보인다. 간호사가 계속해서 불러대는 강수지 님. 아. 하늘하늘 그 강수지 님은 어디 계실까.
계속해서 대기자 명단을 눈으로 훑는데 오랜만에 반가운 이름 우희진 님도 보인다. 우희진. 줄리엣의 대명사 올리비아핫세를 닮은 우희진 님. 잘 살고 있을까. 참 예뻤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티비를 보는데 그곳엔 평소 잘 보지 않는 정치뉴스가 한창이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와야 정치뉴스를 보는 것 같다. 누군가 뇌물을 수수했다고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알고 보니 우리 지역 의원이다.
아. 나는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책을 읽어야지... 내 이름이 대기자 명단에 뜨고 나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마음이 조급해진다. 한 글자라도 더 읽고 진료를 보고 싶은데. 집중해야지... 해야지...
집중을 해야 했다. 나에겐 대기시간 1시간 30분이 있었고 그 시간이면 충분히 많은 양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고작 3페이지를 넘겼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시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명절 전 진료를 받고 싶은 사람들. 며칠 동안 병원이 쉬니 물밀듯 들어오는 사람들은 점심 이후 진료명단에 이름을 적고 사라진다. 2시 이후 대기자 명단이 17명을 넘어간다.
세상엔 왜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을까. 어느 병원이나 사람이 넘쳐난다. 가끔 다니던 병원을 일주일에 한 번씩 6개월을 다니다 보니 이젠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오래 병원에 다녀도 되는 걸까 싶지만 다리나 허리가 아픈 어른들은 끈질기게 병원에 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건가.
나이는 들어가고 아픈 곳은 늘어나고 멀게만 느껴지던 병원에 더 자주 가게 되고 이젠 병원이 낯설지 않고. 끊고 싶지만 내 맘대로 끊을 수 없는 곳. 노인이 더 많아진다는 훗날엔 이런 모습이 일상이 되려나.
걷기와 채식생활을 6개월째 하고 있다. 6개월이면 완벽한 습관이 될 줄 알았는데 현실에선 용암이 분출하듯 억눌러 왔던 욕망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인간은 편안함과 달콤함 앞에서 본능적으로 약한 존재인가.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한 없이 약해지는 나를 본다.
명절이니까 조금만 풀어질까. 개미군단에 매번 합류하는 일은 꽤나 피곤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