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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un 29. 2024

짜증을 죽이는 법

올해 들어 처음으로 원피스를 입었다. 옷을 안 입은 것과 같은, 온몸이 일자로 뻥 뚫린 원피스를 입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매 해 이런 생각을 하는데 올 해도 어김없이 그 순간이 오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짜증이 밀려왔다. 어젯밤 잠들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간 밤에 푹 잤음에도 그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잠을 자면 그런 기분일랑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는 게 정상인데 말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일찍 배송되었다는 장바구니를 집안으로 들여놨다. 짜증 난 기분을 애써 누르며 장본 것을 하나하나 꺼내는 데 냉장고 발치에 하얀 액체가 흥건하다. 순간 짜증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악~~~~~~~


우유가 냉장고 발아래에 강아지가 오줌이라도 싸놓은 것처럼 지도를 그려놨다. 깜짝 놀라 장바구니 봉투를 뒤집어 보니 아래 부분이 축축하다. 우유가 터졌다. 주말 아침부터 짜증이 제대로 났다. 배달기사님도 나처럼 아침부터 짜증이 났나. 갑자기 배송 봉투를 힘차게 바닥에 내려놨을 얼굴 모를 기사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3개 시킨 것 중 2개나 터진 우유팩이 장 본 다른 것들까지 하얗게 적셔놨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그중 하나는 우유가 줄줄 세고 있다. 뜯어서 다른 병에 옮겨 담아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 교환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라면 다른 컵에 옮겨 담아 아이에게 마시라고 주고 말았겠지만 아침부터 뿔난 마음은 고객센터에 상담을 하게 만든다. 실은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지만.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전송하고 당장 급한 우유를 내일 오전 중에나 교환이 가능하다는 문자를 받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마셔버리고 싶지만 혹시 모를 교환에 대비해 줄줄 세고 있는 우유를 밀봉해 냉장고에 넣었다.


내 기분을 알아챈 아이는 못다 한 숙제를 하느라 눈치를 보다 느닷없이 도서관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한다. 그래 가자. 얼른 나가서 이 기분을 없애버리자.




도서관에 도착하면 항상 카페에 들른다. 아이는 레모네이드와 아이스크림 크로플을 나는 언제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당장이라도 서가에 올라가고 싶지만 아이는 카페에서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즐기고 싶어 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책을 읽는 아이들보다 엄마와 함께 문제집을 푸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중학생인가는 일어 과외를 받는 모양이다. 사람 구경을 실컷 한 아이는 눈앞에 놓인 크로플을 급하게 먹어치우다 마지막 한 입을 내게 권한다. 달달한 크로플을 입에 넣고 뜨끈한 아메리카노로 중화시키니 개운한 입안이 된다.


가자. 너는 너의 공간으로 나는 나의 공간으로.


우리는 인사를 하고 각자의 서가로 향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곳.. 사각사각 소리와 뭔가에 집중한 숨소리만이 가득한 그곳에 입장하니 아침의 짜증일랑은 저만치 달아난다. 신간이 있는 곳으로 가서 책 등 하나하나에 눈 맞춤을 한다. 책 제목이,  작가의 이름이, 책에서 뿜어 나오는 다채로운 색이 어느새 내 눈을 사로잡는다. 이 책 저 책을 넣었다 뺐다 하며 책을 고르는 이 시간은 나도 모르게 살짝 흥분하여 벼룩시장에서 엄청난 보석이라도 찾는 기분이 된다.


배고픈 사람처럼 지금 내 마음을 배부르게 할 책들을 몇 권 뽑고 2주 동안 다 읽을 수 있는 지를 가늠한다. 그러다 신간코너를 떠나 저 멀리 내 맘이 닿는 소설 코너로 향해 마음껏 책을 뒤적거리며 제목을 읽고 다닌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데 실은 가장 빨리 흐르는 시간. 그렇게 한 곳에 우두커니 섰다 움직였다를 반복하는 시간이 어느덧 두 시간이 넘어간다. 비가 오려는지 허리도 아프고 어딘가 기대고 싶은 마음에 하릴없는 두 손이 저도 모르게 원피스 옆선을 만지작 거린다.


어... 원피스 옆선이 뚫렸는지 한쪽 손이 옆구리로 쑥 들어간다. 몇 년을 입은 원피스인데 옆선에 교묘하게 주머니가 있다. 그렇담 반대편은? 아. 반대편에도 주머니가 있다. 원피스 양 옆에 주머니가 달려있다는 걸 이제야 발견하다니. 벼룩시장 같은 도서관에서 진짜 보석을 찾은 난 어느새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맘껏 편한 자세가 되어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닌다.


얼마나 그러고 다녔는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화들짝 놀라 아이의 서가로 부리나케 내려간다. 예상외로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다. 다행이다. 오랜만에 보는 흡족한 모습. 무슨 책을 읽고 있더라도 그저 저 모습, 저 자세가 아름다워 보이는 조용한 순간이 이곳에도 있다.


고요한 도서관의 기운으로 어느새 아침의 짜증이 씻은 듯 사라진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한 주머니까지 찾아냈으니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도서관에는 이상한 마법의 힘이 존재하는 듯하다. 평소 느끼는 짜증이나 불안, 걱정 따위는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그곳에 넘쳐흐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요한 숨소리에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침부터 나를 잠식했던 짜증은 저 멀리 도망가고 어느새 난 목욕탕에서 세신을 마치고 나온 사람이 된다.


그나저나 몹시 궁금해진다. 누가 주머니를 만들었는지... 원피스에 보이지도 않는 주머니라니. 편안한 기분이 되어 괜히 두 손을 계속 찔러 넣고 있는 나를 본다. 오늘의 발견, 오래된 원피스의 주머니가 내 마음을 괜히 춤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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