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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작가 Apr 16. 2024

모든 것에는 배움이 있는 거 아닐까요?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교 나이로 15세인 현석(가명)이는 키가 180cm이다. 뭘 먹고 그렇게 자랐는지 키가 작은 나는 현석이와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치켜올려야 한다. 어느 날 복도에서 만난 현석이는 벽에 붙어있는 한 포스터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유심히 봐? 여기 참가해 보려고?"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냥 고민해 보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경험 삼아 해보면 좋지. 고등학교 가면 이런 곳에 참가해 볼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테니까."

그 포스터는 코딩 대회 안내 포스터였다. 현석이는 코딩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나 보다. 우리 반 학생도 아닌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현석이는 이렇게 복도에 붙어있는 웬만한 대회는 모두 참가하고 또 두서의 성과를 거둔다고 하였다.

현석이는 수업 시간에 태도가 월등하게 좋은 친구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바른 자세, 딱 그 자세로 앉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수업을 듣는다. 아는 내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고, 조금 의문이 나는 부분은 주저 없이 질문을 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수업시간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더 눈길이 가고, 현석이의 표정이 아리송하면 한 번 더 설명하게 된다. 실제로 교사들의 순회 지도 모습을 관찰한 연구에서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에게 교사들이 무의식적으로 더 많이 다가간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내가 그 연구 결과를 피해 갈 순 없는 사람인가 보다.




나는 주로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을 비롯해 과학, 건축, 예술, 인문학, 역사 등 거의 대부분의 영역을 수학과 연결 지어 수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학원과 차별화된 수업을 하기 위해 융합적인 수업을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학습지를 만든다. 요즘은 90% 이상 학원을 다니니 소위 '나 좀 알아.' 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단순히 개념 설명하고 문제 풀이식의 수업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학교가 우위에 설 수 있는 영역은 평가영역 밖에 없는 것일까 하고 수없이 고민한 끝에 구상한 수업이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과 노력은 몇몇 아이들에 의해 짓밟혀버렸다.

"선생님, 이거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건데 왜 해요?"

"그냥 빨리 넘어가면 안 돼요?"

결국 시험과 관련되지 않는 내용은 그 아무리 신기하고 재미있다 할지라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회의적인 아이들을 달래 가며 한 학년을 마무리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현석이를 만난 것이다. 현석이는 나의 수업을 정말 좋아했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데 왜 하느냐는 질문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베토벤의 소나타 14번 Moonlight에 숨겨진 수학의 비밀 찾기,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신>>에 소개된 신비의 수 찾기, 올바른 손 씻기 6단계를 알아보고 각 단계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때 손에 남은 세균의 양 알아보기, 우리 집 관리비 고지서나 도시가스 고지서를 보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보는 방안 강구하기 등을 수업했다. 그리고 Moonlight 속 수학의 비밀을 찾아 직접 간단한 작곡 해보기, 신비의 수가 숨어 있는 다른 소설 찾아보기와 같은 과제를 내 보았다. 물론 이 과제는 수행평가가 아니라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이다. 대부분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석이는 달랐다. 꼭 다음 수학 시간이 되면

"선생님, 저번에 내 주신 과제 해왔는데 좀 봐주실래요?"

라며 잠시 과제의 존재를 잊었던 나마저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가기 전 손 씻고 가는 거 확인받기 프로젝트,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보자며 텀블러에 물 담아 마시기 프로젝트도 해 보았다. 이건 마이쮸와 하리보 덕분에 참여율이 좀 되었다. 하지만 끝까지 완주한 친구는 몇 없었고 그중 현석이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꾸준히 참여했고 학교 생활에 진심을 보여주니 나로서는 감동이었다. 그쯤 되니 나도 자식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궁금한 것이 생겼다. '현석이 부모님은 현석이 교육을 어떻게 시키시는 걸까?'




대구수학페스티벌 체험 부스 운영단을 모집한다는 공문이 왔다. 나는 수학나눔학교 운영 담당자였기에 당연 부스 운영자가 되어야 했다. 이 페스티벌과 체험 부스 운영에 관심 있는 친구들 10명 정도를 모아 어떤 부스를 운영할 것인지 주제를 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는 체험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 라틴방진에 대해 가르치고 라틴방진을 이용한 냄비 받침 만들기를 하여 가져갈 수 있도록 학습지, 재료, 간식 등을 준비하고 기획했다. 수학페스티벌 당일 현석이는 체험 온 초등학생들과 학부모님들에게 인기 선생님이었다. 너무 친절하게 설명을 잘해줘서 기분 좋게 잘 배우고 간다는 후기가 잇달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5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 있는데 동생의 공부도 자기가 봐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체험 온 초등학생들의 시선에서 잘 맞춰 가르쳐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우연히 학교 근처에서 현석이와 현석이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 큰 키에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나한테 꾸벅 인사를 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는 길이었나 보다. 요즘 이 시간에 학원을 안 가고 엄마랑 시장에 다녀오는 아이가 있다니!!! 현석이는 현재 학원은 전혀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얼마 전까지 수학 학원만 하나 다녔는데 그마저도 끊고 혼자 공부를 한다고 한다.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엄마와 잠깐 데이트를 하고 5시에 이른 저녁을 먹은 후 9시까지 공부하고 일찍 잔다고 한다. 그동안의 현석이가 보여 준 모습들이 한 큐에 이해가 되었다. 




어느 날 또 복도에서 한 포스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현석이를 만났다. 이번에는 독서 토론 대회 포스터였다. 

"현석아, 너 토론 쪽도 관심 있어?"

"네, 한 번도 안 해봐서 어려울 것 같긴 한데 모든 것에는 배움이 있는 게 아닐까요?"

내가 졌다. 정말 쇠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내가 크게 배웠다. 


사실 현석이는 우리 학교 전교 1등이다. 그냥 1등이 아니라 전 과목 만점자이다. 서술형 평가는 1점 단위로 점수를 깎을 수 있기 때문에 전 과목 만점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모든 것에는 배움이 있다는 자세로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공부하며, 진실되게 하니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거 아닐까? 배움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결과에 연연해하지 말고 단숨에 목표를 이루려 하지 말고, '배우고 제때 익히는'과정 자체를 즐기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이다. 현석이는 배우고 익히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학생이었던 것이다.


"현석아, 너 영재고나 과학고 준비해 볼 생각 없어?"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잘 모르겠어요."

"부모님이랑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고 말해줘.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 같아."


현석이는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적는다. 중요한 것에서부터 간단한 것까지. 쉬는 시간에는 영락없는 중학교 남자아이지만 수업 시간에는 온 마음을 다해 수업을 듣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깊이 생각하여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든다. 뭐든지 꾸준히 성실한 자세로 임하는 이 학생은 과연 나중에 어떤 어른으로 성장해 있을까. 


- 사진 출처: 픽사베이

- 이야기 속 학생 이름: 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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