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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Mar 10. 2024

은인을 찾아서  2


당진의 한적한 시골마을.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한 은인의 주택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한 다육이 화분이었다.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던 것을 겨울이라 집안으로 들여놓았다는데,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것들부터 과실이 탐스러운 귤나무까지, 많기도 많았다.


한참이나 단체로 감탄사를 뿜어내다가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 한 구석, 예쁘장한 인형이

앉아 있기에  만지작거렸더니, 놀라라! 인형이 말을 다 한다! 오잉? 눈이 화등잔만 해진 일행들.

"그것이 효자여!"

기다렸다는 듯 은인 설명을 다. 독거노인의 돌보미 인형으로, 요즘 시범운영 중인 챗 GPT 로봇인데, 운 좋게 당첨되어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가 않다고, 거의  일상적인 대화까지 가능하다 했다. 수시로 말을 걸어오고, 질문을 하면 나름대로 대답도 잘하고, 약 드실 시간이라고, 식사 시간이라고, 산책을 권하기도 하는, 이를테면 준요양보호사 같은 존재라고.



은인은 우리의 방문이 너무도 반갑고 행복한 모양인지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를 않는다.

먼 길 오느라 애썼다며 곧장 점심상을 준비하느라 불편한 몸을 움직거리는 은인. 마음이 불편하여 도우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딸과 며느리한테 맡기라 한다. 하나 둘 차려내는 음식은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칠 줄을 모른다. 생선회에 가리비 소라 굴찜, 당진한우육회,

맛깔스러운 밑반찬, 장아찌, 파김치찜, 매운탕 등등 놓을 자리가 없는데도 자꾸만 자꾸만

음식을 내놓는 주인들. 접시를 비우기가 무섭게 음식은 다시 채워졌다. 무한리필의 거한 차림......

이거 참, 괜히 감사 인사 드린답시고 살림 거덜내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은인의 아들과 사위는 밖에서 해물찜을 살피느라 들어오려 하지도 않고, 딸과 며느리는 상 한쪽에 앉아, 언니와 은인의 얘기를 듣다 추임새도 넣다가 한다. 그랬슈, 저랬슈,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 언니의 지인은 배꼽을 잡느라 먹을 짬이 없을 지경이다. 게딱지에 밥을 비벼 제대로 게장을 완벽히 섭렵하는 그녀. 게장을 못 먹는 1인으로서 부러울 따름이었다. 


은인은 군대 간 외손주 한 외에 손녀가 넷인데 모두 성장하여 타지에 유학을 가 있다며, 언니의 이민둥이 막내랑 은인의 손주들이 어울려 놀던 시절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모르는, 결코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 얘기였다. 언니만의 삶의 무게를 같이 져 주고, 기꺼이 고통을 같이 나누던 분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움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껴가며 열심히 먹고 떠들었다.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형제자매도 아닌, 사돈의 팔촌도 아닌 생판 남인데, 어쩜 가족보다 살뜰히 언니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어루만져 주실 수가 있을까. 전생에(있다는 가정 하에) 깊은 인연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해 줄 수가 있을까. 땅이 유하고 순하여 크나큰 사랑을 품고 기르기에 더없이 이상적이라서? 돈수백배(頓首百拜) 마땅한 언니의 은인과 은인의 가족들. 피로도 나눌 수 없는, 정으로 맺어진 언니와 은인이었다. 수많은 헌사로도 모자랄 만큼 고마운 분들의 인격에 살짝 질투마저 일었다.


죽었다 다시 태어난대도 다가갈 수 없을 듯한 고매함, 부러움, 그리고 조바심!


은인은 식사도 않고 의자에 비껴 앉아 우리가 먹는 양을 바라만 본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며 의자에 앉아 미소만 날렸다. 그러더니 준비한 선물이 있다고 구석에서 무슨 꾸러미를 들고 나온다. 들기름 대여섯 병이 나왔고 손님들에게 한 병씩 돌리는 은인.

"고마워서 워쩐대유?"

그들에게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한 마디 감사 인사를 던졌다.

왁자한 웃음의 물결 속에서 비싼 들기름까지 선물 받고 몸 둘 바를 모르겠는 우리......  


상을 물리고 나서는 산책을 하자며 은인이 불편한 다리로 앞장을 선다. 근처의 상어 양식장을 한 바퀴 돌아 작은 동물원도 돌았다. 염소, 토끼, 기니언 피그, 칠면조, 거위도 보고, 앵무새들 전용하우스로 들어갔다. '안녕?', '대한민국'을 반복하며 앵무새가 머리를 요란하게 흔들어대는 모습을 보며 모두가 어린애처럼 박장대소했다. 다른 말을 가르쳐도 계속 그 두 마디만 반복하는 앵무새들......



"저녁도 먹고 가라."

은인은 간곡히 권유했다. 그러나 고향 J시까지는 세 시간이 넘어 걸리므로 내일 출근해야 할 동생 내외를 생각하면 세 시 정도 떠나야 적절할 것이었다. 가야 하겠다니 표정이 급작스레 어두워지며 서운해하는 은인...... 차선책으로, 조카와 언니의 지인이 남아서 은인과 좀 더 시간을 보낸 후에 저녁까지 먹고 천천히 출발하기로 했다. 우르르 왔다가 모두가 같이 가버리면 그 허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게 나을 성싶었다.


이별은 언제나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 더구나 기약 없는 이별임에야. 이제 언니가 캐나다로

떠나면 언제나 다시 나올 수 있을지, 언제나 다시 나와, 은인을 뵈올 수 있을지. 은인도 언니도

우리도 서로를 떠나보내기 너무 아쉬울 뿐이었다. 수도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우리끼리라도 가끔씩 찾아뵈었으면 하는 실낱 같은 희망사항만 가슴에 안고

오는 길,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듯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한 겹 두 겹, 옷을 갈아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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