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심청 궂게도 불어대던 3월의 어느 날, 국민학교 친구들 몇몇이 뭉쳤다. 국민학교 밴드가 활성화가 잘 안 되어 가끔 맘에 맞는 친구들끼리 개인적인 만남을 갖곤 했는데, 엄마 상사를
위로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모임을 주선하였다. 한 달 전부터 약속을 잡았는데
전날 못 온다고 통보한 야속한 한 친구......
"그럴 줄 알았어. 걔가 우리랑 약속해 놓고 못 나온 게 한두 번이냐고.
걔는 못 나오는 게 아니고 안 나오는 거야. 우리랑 어울리기 마땅찮은 거야."
우리는 심정이 조금 상했지만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어떻게 매번 약속만 하면 무슨 일이
생기고 아프고 바쁜 일이 생기는 건지.
한두 번이면 몰라도 매번 그러니 다들 포기하는 눈치다.
그 친구는 잘 산다. 아들 둘도 일류대를 나와, 내로라하는 여의도의 직장에 다니고 이미 독립한 지 오래다. 세상 자유로운 전업주부(오로지 전업주부로 지금까지 살았다)로 살면서, 뭐가 그리
바쁘고 급한 사정이 많이 생길까. 한 달 전부터 정한 약속을 어길 만큼 급한 사정이라는 건 무얼까, 대체......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는 우리랑 어울리기 싫은 게 확실하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언니들과 한다는 골프 모임도 자주 나가고, 또 남사친들도 나오는
밴드 모임에는 꼭 참석한다. 그러면서도 동성의 친구들 몇몇만 나오는 소모임은 불참하는 그녀를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하여, 그동안 우리끼리의 소모임 단톡방에 초대를 안 했는데 어느 날인가
그 친구가 단톡방에 슬며시, 소리소문도 없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안부를 묻고 환영은
해 주었다. 그리고는 역시나 올 때처럼, 슬며시, 나가버리는 그녀. 정말 이해불가였다.
선망해 마지않는 그녀가 모임에 오든 말든 제 자유이겠지만, 놀림당한 것 같은 마음에
서운함이 감도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잠시나마 그 시절 추억을 꺼내 보며, 수다도 떨고,
사는 얘기 나누며 시름을 잊어보자는 건데, 그것이 시시하여 안 나오는 것인가. 골프를 치지
않는 우리와 어울리는 것이 시간낭비로 느껴져 싫은 까닭인가.
이해관계를 모르던 어린 시절의 친구를 만나 시간여행을 해 보는 것도 나름 삶의 활력소라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아니었나......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서울에 가발 매장을 여럿 가지고 있는 친구는 얼마 전 쌍꺼풀 수술을
했다며 자진신고를 한다. 한 달쯤 되었다는데 부기도 거의 없고 상태가 아주 좋아 보였다.
어디서 했어? 비용은 얼마나 들었고? 아프지 않았어? 줄기찬 질문세례. 수술에 관한 모든 과정을 브리핑하는 그녀의 활기찬 음성, 에너지가 참 좋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나야 나!' 과연, 오늘
모임의 주인공은 친구였다. 눈꺼풀이 자꾸 쳐지는 것 같아 하게 되었다고 너희들도 해야겠다며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해물탕과 전복 갈비찜을 먹으면서도 우리들의 수다는 끊이질 않았다. 암투병 중인 친구에게는
좋은 것 많이 먹고 건강관리 잘해라, 완치 판정은 언제 받냐,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겁게 살아라,
진심 어린 조언과 권유를 쏟아부었다. 이야기하기를 제일 좋아하고 말발 센 한 친구는 성대결절이 있어 목을 좀 아껴야 하건만 제일 신났다. 일 년 만에 만났으니, 쌓인 이야기가 좀 많을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선에서 열심히 뛰었는데 성대결절로 몸에 무리가 가서 쉬고 있는 친구.
성남 아파트를 고점일 때 팔아 전세를 살고 있는 친구네는 집 구매의 시기로 고심하고 있다고.
연로하신 부모님 얘기로 화제가 옮겨가고, 또다시 엄마 장례식 얘기가 나오고 모두가 남의 일만이 아니기에 같이 안타까워하고 위로를 안겨 주고는 한다. 자녀들 얘기가 나오자 하나같이
부모노릇이 너무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있는 힘껏 잘해줘도, 엄마가 너무 다 해 주어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탓을 한단다. 독립은 하고 싶어 하고, 독립할 능력은 없어 부모의 재력으로 독립을 시켜주길 바라는 젊은 직장인 자녀들. 간섭은 싫고 지원은 바라는 자녀들.
길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부모의 당연한 의무라 여기는 자녀들.
못 해준 것만 떠올라 한스러운 부모 마음은, 꿈을 모르겠다는 자녀의 말에 꿈을 키워주지 못함이 애석한 부모의 마음은, 자책의 가시가 되어 마음을 찌르고 마는..... 부모의 마음은 어쩜 그리 한결같은지. 그 한결같은 부모의 마음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내려놓아야 한다고, 어느 정도 성장했으면 관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고명하신 강사님들은 얘기를 한다. 공감이 가지 않는 건 아닌데, 선진국처럼 일찌감치 독립성을 키워주는 교육체계나 의식의 대전환 없이 갑작스레 구호만 외친다고 변혁이 쉬이 이루어질까. 요즘처럼 살기 팍팍한 시대에.
"부모 노릇, 자식 노릇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권리와 의무사이를 적절히 오가며 살았다. 정말 대단하지 않니, 우리?"
결론은 그거였다. 그래, 노후 준비도 열심히 해가며 앞으로도 자녀들에게 아낌없는 응원과 최소한의 지원은 해 주고, 가끔씩 만나 마음을 나누자꾸나. 여인들의 수다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