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했다. 집안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나서니 열 시가 다 되었고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몇 번 고민 끝에 지하철이 낙점!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데, 내 곁에 서 있던 그의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미안하다며 그이를 밀치고 조급히 걸어 내려갔다. 기분이 나빴던지, 그리 아름답지 못한 소리가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황급히 제지했다. 바쁘신가 본데 그냥 넘어가자 하니 오히려 큰소리로 그 부당성을 늘어놓는다. (우렁찬 음성!)
"예전에는 한 줄 서기였지만 요즘은 두 줄 서기를 해야 한다고, 그래야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안 난다는데!"
자꾸 그러시면 같이 안 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나도 썩, 같이 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마누라 10년 젊어 보이기 운동'의 일환으로 집순이에게 바람을 쏘여 주려 같이 나온 것뿐이다.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그. 애써 한숨을 삼켜야 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열변을 토했다. 그야말로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닌, 말싸움을.
"노선을 검색했더니 왕십리에서 환승하여 27분 걸린다네요."
"왕십리에서 갈아타면 빙 돌아오는 거니, 군자에서 갈아타면 될걸?"
"지하철 노선 앱에 이렇게 나오는데?"
"아니라니까. 뚝섬은 2호선이고 뚝섬유원지는 7호선으로, 다르다니까."
"지하철 노선 앱으로 검색했는데? 검색이 잘못 알려줄 리가 있나?"
"자양역으로 검색했어? 자양으로 바뀌었으니까, 다시 해 봐. 하여튼 우기는 사람에겐 못 당한다더니."
자양으로 다시 검색. 군자역 환승, 걸리는 시간 19분.
분하지만, 그가 이겼다. 내가 졌소. 항복을 선언했다. 1회전, 2회전을 치른 복싱 선수처럼 상당한 체력 소모전을 치른 후에야 우리는 자양역에 이르렀다.
곧장 서울 생각마루로 들어갔다. 7호선을 타고 한강을 가로지를 때 보이던, 얼핏 우주선처럼 신비롭게 느껴지던 공간을 이제야 와 보다니!
2월에는 개장을 안 해 허탕을 쳤었다. 날씨마저 흐리고 을씨년스럽던 그때, 꼭 다시 와 보리라 다짐을 했던...... 기실 자양동은 신혼시절 둥지를 틀었던 곳으로, 감회가 남다른 곳이다. 그 더웠던 1994년 여름 저녁, 뚝섬 한강시민공원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곳이 없었고, 유모차를 밀고 나아가는데, 김광석의 '일어나 너 걸어라'가 선상카페에서 마구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상전벽해를 세 차례나 겪어낸 지금, 뚝섬유원지 한편으로는 7호선이 지나가고 요상한 우주선도 생겨났다, 자벌레처럼 생긴 서울 생각마루가.
어린아이처럼 들떠서는 발도장을 찍고 사진도 찍었다. 텅 비었을 거라고 추측만 하던 그이도 다양한 체험 공간에 놀라는 눈치다. 한강의 역사, 신석기 유적, 한강이 품고 있는 섬에 대한 유익한 자료 등도 구비된 한강 이야기 전시관, 북 카페, 키즈카페, 조용히 휴식하거나 작업할 수 있는 자유공간, 한강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까지! 어린 자녀가 있다면 꼭 같이 오고 싶은 곳, 데이트코스로도 꽤 이상적인 걸 싶었다. 스쳐 지나갈 땐 좁아 보이던 자벌레 생각마루가 이토록 넓고 다양한 공간을
숨기고 있다니! 무리 지어 천정을 날고 있는 나비 떼(나방인가?)는 자벌레의 환생을 나타내는 것인가, 몽환적 아름다움을 풍기는 나비 떼의 비상은.
자벌레 우주선을 탈출하여 지구로 귀환, 굳건히 땅을 딛고 주위를 살폈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
윤슬은 마음에 아롱지고, 자작나무 그늘 아래 휴식을 취하는 이, 되게 부럽다. 신선이 따로 없고, 화폭에 자작나무를 담는 어르신들 또한 신선의 먼 친척쯤 되어 보인다.
무슨 장이라도 선 것인가, 벼룩시장이라도 열리는 걸까? 박람회로 향하는 초입부터 인파로
북적대는 것이, 뚫고 갈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다가가보니 그것은 장도 아니고
벼룩시장도 아닌, 장애우 사생대회였다. 장애우들을 인솔해 온 선생님들, 자원봉사자들이 바삐 오가며 장애우들을 지도하느라, 햄버거를 나눠 주느라, 조금은 소란하고 분주한 모습이다.
거진 일 대 일 케어를 해야 하니 더운데 얼마나 수고로울까. 혹시나 생길 불상사를 대비하여
뙤약볕 아래 정해진 라인에서 파수를 보는 학생 자원봉사자들에게도 경의를!
정오가 가까운 시각, 모자와 선글라스, 양산으로 중무장한 관람객들의 행렬에 끼어 슬슬 정원
관람을 시작했다. 얼굴 타니까 양산을 씌워주려 해도 그는 괜찮다며 사양한다. 한낮의 자외선은 피부에 안 좋다, 잔소리해도 양산 밖으로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다음부터는 한낮을 피해 아침
일찍 오든지, 오후 늦게 오든지 해야지 원.....
손수건 염색체험 코너를 비롯한 여러 체험코너 부스는 시간상 지나쳤지만, 각양각색의 화초들을 판매하는 코너는 그냥 지나갈 수만은 없었다. 후다닥 사진 몇 장을 찍고 저만치 앞질러가는 그이를 따라잡는 식으로 주욱 감상을 했다. 대기업에서 조성한 정원은 역시 스케일이 남달랐다. 풍경화 속에 추상화를 접목한 듯 참신하다. 나무와 형형색색의 화초들, 자갈이나 벽돌, 나무 소품과의 어우러짐과 여백까지. 그 창의적인 공간연출이라니!
이목을 사로잡는 정원 앞에서 관람객들은 쉬이 발길을 떼지 못하였다.
머뭇머뭇, 찰칵찰칵. 순간을 영원까지 남기고픈 소망은 다들 비슷하므로 기다리는 시간마저 향기로웠다. 삽으로 푹 떠서는 그대로 집에 옮겨다 놓고 싶은 정원!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 가꾸어 살고 싶은 오솔길을 품은 정원! 빨갛거나 하얀 나무 의자를 정원 한편에 놓으니, 밋밋한 정원은 사색하는 공간으로, 동화 속 풍경으로 변신하여 관람객들을 마냥 홀리는 것이다. 천체를 닮은 알리움은 신비로워 마음을 사로잡고, 청매화붓꽃은 보조개처럼, 작고 소중한 손 안의 새처럼 보는 이들의 마음을, 심장을 조여들게 만든다. 느부갓네살의 공중정원도 이처럼 매혹적이었을까.
왼쪽: 청매화 붓꽃한테 반했어요.
빛과 바람과 흙의 조화. 비엔날레의 현란한 색채를 물리도록 마음에 품어 안고는 물가로 자리를 잡았다. 오리보트가 열 지어 묶여 있다. 그랑 데이트할 때 탔던 추억의 오리 보트가 다시금 지난날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버드나무 위에선 까치들이 무슨무슨 대화를 하는지 제법 시끄럽다. 한 마리가 지저귐 소리가 이상하다. 목에 뭐가 걸렸나, 다른 녀석이 다시 울어보라 재촉을 하는지 이상한 지저귐이 계속 이어진다. 갑작스레 저만치서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 물가에서는 한참 동안, 물새가 사냥한 물고기를 꿀컥 삼키는 리얼 다큐멘터리가 방영된다. 미꾸라지인지 뭔지 조그만 놈이 물가를 왔다 갔다, 한다. 박람회를 위해 조성된 화려한 정원도 좋지만, 풀과 풀꽃이, 물과 바위가 있는 이런 장소도 좋다. 박람회의 정원에는 물이 빠져 있었다. 물흐름을 제어하기가 어려운 여건 때문이겠지만, 물로 채워져야 할 곳이 그저 모래 바닥이어서 좀 아쉬웠다.
걸어갈까?
좋아요. 더운데 괜찮을까?
괜찮지 그럼.
어르신이 걱정돼서.....
이 사람이. 나 벌써 그런 소리 들을 나이 아니야!
이순(耳順)을 넘긴 어르신 하고 지천명 중반인 나하고 뙤약볕을 뚫고 가 볼까요?
자그마한 양산에 나란히 숨어, 태양의 집중포화를 막아내며 광진구에서 강동구의 가장자리로 무사히(?) 도착했다. 곳곳에 시원한 아름드리 포플러, 버드나무 그늘과 벤치가 있어 쉬엄쉬엄 걸어올 만했다.
"오늘, 마누라 십 년 젊어 보이기 운동 성공했네요. 오늘 만 구천 보 넘게 걸었다오."
"난 만 오천 보 넘었을 뿐인데?"
"당신 컴퍼스가 길고 난 짧아요. 인정한다니까."
설전 방지용 언어를 급히 꺼내놓으며, 만 구천 보 넘게 걷느라 상당히 고생했을 다리를 위해, 일단, 의자를 찾는다. 그나저나 강가 벤치에서 등짝을 구릿빛으로 태우던 사람은 선탠이 잘 되었으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