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화면이 반짝였다. 아침 9시에 전화라니. 모르는 번호인데 도대체 무슨 용건일까.
“여보세요. 여기 안과인데요.” 들어본 적 있는 아주 상냥한 목소리였다.
“지난번에 진료받으셨잖아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업무 실수로 2700원을 덜 받았어요. 계좌번호 알려드릴 테니 미수금 좀 보내주시겠어요?”
큰 금액도 아니고 착오가 있었다 하니 알겠다고 답했는데. 돌연, 꾹 참아 넘겼던 말이 울컥 튀어나왔다.
“아니오. 그날 검사는 정말 많이 했는데 선생님이 설명도 잘 안 해주시고, 경황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바가지 같았어요. 돈은 못 보내겠어요.”
그래, 그랬다. 다양한 검사를 했으나 상식적인 설명 외엔 들은 것도 없고 진료비만 왕창 내서 너무 억울했다. 얼마 전 만났던 그 의사와 전화를 건 그녀는 공범이었다. 눈이 답답해 전문 안과에 갔는데, 작년에 진료받았던 젊은 선생이 사라져 버려 접수처에서 추천해 준 다른 선생에게 갔다가 별꼴을 당한 것이었다. 유명한 병원이니 좋은 의사들만 있을 거란 생각은 완전 착각이었다.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잘못 왔구나 싶었다. 썩은 동태눈깔처럼 흐리멍덩한 눈빛을 한 나이 든 의사가 권위로 무장한 연설을 해댔다. 현대인의 몇 프로가 고혈압에 비만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시작된 말은, 좋은 얘기겠지만 그래서 그게 내 눈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야말로 잘난 척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는 듯 그는 계속 읊어댔다. 그 유명한 전문안과 병원에 왜 그 진료실 앞에만 대기줄이 없었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내가 안구건조증과 녹내장 가족력을 말하자 의사는 심각할 수도 있다는 둥 조기 치료가 중요하다는 둥 갑자기 위협적인 분위기로 돌변하더니 무슨 검사를 하고 또 새로 나온 어쩌고 검사까지 다 하고 다시 자기한테 오라고 했다.
내 눈에 그렇게 문제가 많단 말인가, 불안해졌다. 내가 진료실에서 나오자 의사 옆에 있던 젊은 직원, 그러니까 전화 속의 그녀가 따라 나왔다. 검사에 대한 안내를 해준다고 했다. 그녀는 예뻤고 특히 속눈썹이 엄청 길었다. 물론 마스카라이긴 했지만. 네일숍에서 공을 들였는지 손톱 위에서는 작은 보석들도 번쩍였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할 외모인 데다가 말투도 아주 상냥했다. 여러 검사들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아주 잘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안구건조증 검사가 뭐냐고 묻자 건조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라고, 그게 왜 필요하다고 했더니 정확한 수치를 알아야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지만 그녀의 확신이 전해져 중요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시간이 오래 걸리냐 아프냐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모두 다 아니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권위적인 의사의 위협과 예쁜 그녀의 설명은 병 주고 약 주는 콤비처럼 상당히 조화로웠다. 망막검사, 안저검사 등 어렵고 이름도 잘 모르는 검사를 여러 개 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안구건조증 검사는 기가 막혔다. 일정 시간 동안 눈을 깜빡이지 못하게 하면서 충혈 정도를 살폈고, 눈을 찌르더니 눈물이 얼마 나오는지 그 양을 본다고 했다. 진짜 눈물 나게 아팠다. 그녀의 설명은 거짓이었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많이 아팠으니까. 그리고 비보험이었다.ㅠㅠ
그렇게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역시 의사는 연속적으로 재수가 없었다. 50대에 들어서면 건강이 나빠진다거나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거나 운동을 해야 한다거나, 그런 중요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가정의학과도 아닌 안과에서 뭐 하는 것인지. 불안한 나는 물었다.
“선생님, 그래서 결과가...?”
그러나 잘난 그 의사는 “에, 그건 나중에~”라면서 자기 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그는 다른 유능한 선생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열등감을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 환자에게 자랑함으로써 해소하려던 것일까. 결과를 바로 알기 원하는 환자의 마음을 무시하고는 백내장, 녹내장 설명을 길게 했다.
혹시라도? 가슴이 조마조마, 무서워졌다. 의사는 한참을 떠들더니 “다른 건 아직 괜찮고 안구건조증이 심합니다.”라고 이미 작년에 내가 들었던 진단을 내놓았다. 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사람을 공연히 쥐었다 놨다 도대체 뭐 이런 게 있나 싶었지만 따질 수는 없었다. 의사는 대단한 검사였다는 듯 “안구건조증 수치가 28이군요. 심하시네요.” 이 말 한마디, 내겐 아무 의미 없는 숫자를 덧붙였다. 분명 다른 질문도 했건만 답변은 없었고, 결국 받은 것은 상식 선의 설명에 안구건조증에 사용되는 보통 약들뿐이었다. 전문병원에 가서 인터넷을 클릭하면 언제든 나오는 내용만 듣고 돌아온 것이었다.
돈을 못 보낸다는 말에 그녀는 뭐라 답할까. 약간 겁이 났고 잠시 침묵이 흘렀는데.
“네, 알겠습니다~”
그게 다였다. 역시나 친절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녀도 바가지란 것을 인정한 셈인가. 정당한 검사들이었다면 끝까지 2700원을 고수하지 않았을까. 그냥 귀찮아서 그깟 2700원은 던져버린 것일까. 혹은 다음에도 호구가 될 만한 환자이니 봐준다는 속셈이었을까.
의사의 위협에 겁먹고 직원의 친절함에 속아 제대로 바가지를 쓴 일, 나 같은 일반인이 대응할 방법은 없다. 전문분야를 공부할 수도 없고, 의사의 성향을 미리 체크해 고를 수도 없고, 설명에 대해 몇 번씩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없다. 그저 불가항력이라 생각하고 운을 빌 뿐인가. 그날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2700원을 떼먹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