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없는 기회, 놓치면 후회합니다.”
나른한 오후, 홈쇼핑에서는 단골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절대로 속지 말아야지, 하면서 채널을 돌리려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밍크코트인데 J모피에다 커다란 후드에는 사가폭스가 달려 있었다. 그 가벼운 털이 바람에 살랑거리면 시들어가는 내 얼굴도 좀 여리여리해 보일까. 어느샌가 나는 그만 방송에 빠져들었다.
결혼 후 10년 넘게 도쿄와 밴쿠버에 살았는데 그곳에서는 모피를 본 적이 없었다. 보통 도쿄 사람은 사치품처럼 튀는 모피보다는 고가의 모직 코트 같은 은근히 고급임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밴쿠버는 겨울도 춥지 않고 동물애호가도 많았으며, 또 보통의 서양인들은 원래 옷에 돈을 쏟아붓지 않았으니 모피란 딴 세상 물건이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긴 했지만.
밴쿠버에 간 첫해, 캐나다 거주 10년 차인 친구에게 어떤 얘기를 들었다.
“코퀴틀람에서 어떤 한국 아줌마가 발끝까지 오는 밍크를 입고 산 근처에서 어슬렁대다가 총 맞을 뻔했대. 그 동네는 사냥도 하잖아. 털 많고 뚱뚱한 거 멀리서 봐봐. 곰이나 사람이나 다 똑같지.”
친구와 나는 킥킥대며 우리는 롱밍크가 없어서 다행이라 했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평지라 다람쥐, 토끼, 스컹크 정도만 있었지만 코퀴틀람은 달랐다.(한국인이 많이 사는 밴쿠버의 한 지역인 그곳은 산도 있고 겨울이 되면 곰이 먹이를 찾아 인가에 출몰한다. 곰이 쓰레기통을 못 열게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야 여닫을 수 있는 뚜껑을 사용할 정도다.)
그저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얘기였지만, 만약 정말 총에 맞았다면 아주 비극적인데. 한편으론 상당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따뜻하려고 남의 생명을 빼앗아 옷을 해 입었는데 그 옷 탓에 위험에 처하게 됐으니 말이다. 역시 모피란 접근하지 않는 편이 마음도 육체도 안전할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살다 왔으니 서울에서 체감한 모피의 인기는 놀라웠다. 백화점에도 홈쇼핑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동네에 아주 많았다. 모피코트 하나 걸치고 수면바지를 입고, 심지어 맨발에 슬리퍼로 다니는 젊은 엄마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모피란 편하면서 따뜻하고 또 멋도 부릴 수 있는 아이템일까.
이런 선택은 개인적 취향이므로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모피를 만들려면 일단 많은 생명이 죽어야 하니 일반적인 공장 상품과 똑같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코끼리 정도 사이즈라면 한 마리만 죽어도 코트도 나오고 남은 가죽으로 구두와 가방도 만들 수 있겠지만, 여우도 작고 특히 밍크는 주먹만 하다. 유전자 조작을 해도 여우와 밍크를 코끼리처럼 키우기는 요원할 테고, 또한 어쩌다 한 마리를 죽이니 괜찮다 생각하더라도 당하는 한 마리로서는 절대 괜찮지 않다. 100% 사망이니까. 인간 생존에 꼭 필요하다면 모를까 남의 생명을 해하는 것은 영 찜찜하다.
그렇다고 각자의 가치관과 패션센스가 있는 마당에 이런 생명윤리 하나로 모피 소비를 반대하고 싶지도 않다. 당위성보다는 자발적인 마음과 판단이 중요할 테다. 진짜 모피보다 더 가볍고 따뜻한 환상적인 에코퍼를 만들거나, 에코퍼가 최신 유행의 아이템이 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밍크 방송을 쭉 보는 나는 도대체 뭐람. 쇼호스트가 방송을 참 잘했다. 일 년 간 수고한 자신을 위한 보상이라거나, 모임에 나가서 기를 펼 수 있는 의상이라거나, 남들은 다 입었는데 자기만 없으면 인생이 씁쓸하다는 등등,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마음을 뒤흔들 멘트를 연거푸 쏟아냈다. (문맥과는 상관없이 솔직히 고백하건대, 내돈내산이 아닐 뿐 나도 엄마와 시어머니에게 받은 여우목도리나 밍크베스트가 있긴 하다.)
나는 분명 생명을 존중하고 밍크도 여우도 토끼도 다 불쌍한데, 쇼호스트의 말을 들을면서 그 모피코트를 보니 더 예뻤고 구매 대열에 동참해야 할 것만 갔았다. 나만 없으면 가엾잖아~ ㅠㅠ 이것도 일종의 가스라이팅일까. 어차피 만들어 놓은 코트니 누군가는 살 테지, 하고 나를 변호하면서 홈쇼핑 앱에서 주문 버튼을 누르려다던 순간.
소비를 말릴 수 있는 강력한 복병이 등장했다. 다음 달 나올 카드청구서가 내 머리를 스쳐간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소비를 결정짓는 것은 생명윤리도 패션도 아닌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주머니 사정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세일이라 해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으니 그 돈으로 차라리 여행을 가자고, 난방도 잘 되는 집에서 게다가 지하철역도 코앞인데 그런 따뜻한 옷은 필요 없다고 나를 설득하며 겨우 채널을 돌렸다.
결국 나는, 부자가 아닌 덕에 결제의 유혹을 물리치고 생명윤리를 수호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 이리 머리와 마음은 따로 노는 것인지.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말과 행동이 다르고 자신의 의지를 실천할 줄 모르는 사람? 예쁜 것을 보면 혹하고, 번지르르한 말을 들으면 금방 넘어가는 사람? 쑥스러워져서 반성인지 비난인지를 해보다가, 사람이 어떻게 한 마음으로만 살아가냐고 나를 옹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