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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마음 Dec 22. 2024

흔들리는 당신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일반인을 아시오.’ 혼자 중얼거려 본다. 가슴과 등이 딱딱해지다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배까지도 굳어지는 증상,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상하고 요상한 증상이 나를 침범했다. 생명의 자취가 흐릿해지는 듯한  경직 상태다. 거기에다  호흡이 곤란한 느낌까지 가세하면 이러다 정말 박제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두렵다. 그럴 때면 의자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거나, 그것도 힘들다면  일단  침대에 누워야 한다.        


이 증상의 원인을 스스로 짐작해 봤다. 물론 나는 의사가 아니니 돌팔이의 견해에 불과하다. 아마도 안 하던 짓을 해서 탈이 난 게 아닐까. 몇 달간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던 것이 화근이리라. 나 같이 타고난 골골 인간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종종 일어나니까. 오랜만에 실천해 본 ‘집중’이나 ‘열심’이란 것이 내게는 독은 아니었는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저질 체력에 금 가는 소리가 여지없이 들렸다.        


견디다 못해 병원에 갔다. 의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 가슴 부분을 눌러보고 그럴 때마다 ‘악!’하는 나의 신음 소리를 확인하더니 갈비뼈에 염증이 생겼다고 말했다. 나는 몇 가지 검사를 받았고 의사는 어딘가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약과 운동치료를 처방해 주었다. 나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 생긴 근육통으로 보이니 일단 처방대로 해본 후 그래도 증상이 좋아지지 않으면 다른 검사를 더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간 너무 움직이지 않았다는 의사의 원인 규명. 설마 했는데 이 돌팔이의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맥락이지만, 불현듯 공자님의 ‘불혹(不惑)’이 떠올랐다.  외부 상황에 혹하지 않는 흔들림이 없는 상태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육체적 불혹이요, 그만큼 하나에 집중했다는 것은 정신적 불혹이었다. 공자님은 아무래도 정신적 의미를 논했겠지만. 

     

이십 대에는 마흔이 되면 모든 것이 안정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철저한 오해였다. 고민과 흔들림은 세월이 가도 타고난 천성처럼 변함이 없었고, 차라리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오락가락’, ‘갈팡질팡’을 꼽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이런 이력을 놓고 보자면 이번 몇 달 간이야말로, 마흔에 못했던 불혹을 실천한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기뻐해야 하는가.

     

육체적 증상과 ‘불혹’이란 단어를 결합한 넌센스 게임 같은 생각은 어느새 ‘살아있는 인간에게 과연 불혹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땅에 붙어 있는 식물조차도 해를 따라 움직이며 살아가는데 하물며 인간은 어떠할까. 


의식 불명으로 누워만 있던 환자가 발가락을 희미하게 꼬물거리는 순간 ‘살아났어요!’라며 기쁨으로 울부짖는 보호자의  모습을 우리는 드라마에서 많이 보았다. 그만큼 흔들림, 움직임이야말로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뜻이다. 아, 어쩌나~ 공자님이 가르친 ‘불혹’이란 살아있는 생명에게는 무리인, 자연의 이치를 무시한 그저 이상 속 개념에 불과한가. 그야말로 Mission Impossible~        


그렇다면 군자들이 그리도 논하던 정신적 불혹은 어떠한가. 살다 보면 기쁜 일, 슬픈 일, 마음 상할 일 등등 여러 상황을 겪게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미혹됨이 없다니? 서 있기도 쓰러지기도 흔들리기도 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모름지기 로봇이 아닌 이상, 사람이라면 기쁘면 기뻐하고 슬프면 슬퍼하는 것이 정상이리라. 또한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인 만큼, 세상과 소통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며 적당한 분량의 흔들림으로 대처해가는 편이 합리적일 것 같다. 혼자서 외딴 섬에 들어앉아 사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산다는 것은 유연한 흔들림과 그 흔들림을 지탱해주는 균형감의 상호작용일 테니.     


망상처럼 이어진 생각의 고리 속에서 나는 이미 불혹(不惑)에 대한 미련을 탈탈 털어 버렸다. 시대와도 나의 성향과도 영 맞지 않다는 판단과 함께.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제발 나의 육체가 경직된 상태에서 벗어나 마음 놓고 호흡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박제처럼 내게 다가온 불혹의 상태는 죽음이다. 그간 반성했던 ‘오락가락’과 ‘갈팡질팡’도 어찌 보면 잘 살려는 시도였고 의지였다. 나는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고민하며, 미래에도 흔들흔들 움직이며 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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