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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날의마음 Dec 23. 2024

내게 후한 사람

  “남편은 이 집 별로라고 했는데 내가 좋다고 그 아파트 전세 빼서 이거 샀잖아. 대출받은 것도 힘들고 그런데 집값도 안 올라. 팔려고 내놔도 안 나가고. 차라리 그 동네에 작은 거를 샀어야 했는데. 에휴! 거기는 이제 두 배나 올라서 못 가겠더라. 내가 미쳤지. 남편이 뭐라는 줄 알아? 내 말 들어서 잘된 일이 하나도 없대. 막 원망해. 집에서 밥도 안 먹고 얼굴도 안 보려고 해. 다 내 잘못이지 뭐야. 하루종일 울다가 죽고 싶단 생각도 해.”     

  오랜만에 들은 친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내용은 절대로 차분하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카톡으론 잘 지낸다는 이모티콘을 보내니 그런 줄 알았더니만 전화로 이렇게 폭탄 발언을 하다니. 몇 해 전 복잡한 아파트 동네는 답답해서 못 살겠다고 대형빌라로 갈아탈 때만 해도 마음 편해 보였는데, 부동산 시장이 요동치자 사달이 난 것이다. 때마침 친구도 그 남편도 갱년기라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진 듯했다.  

  생각해 보면 그 남편 입장도 이해가 갔다. 친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꼭 하고 마는 타입이었고 그 남편은 적당히 잘 맞춰나가는 타입이었으니 살면서 친구 입김에 휘둘린다 싶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퇴직 즈음이 돼서 집이 그 모양이 됐으니 화날 만도 했다. 대한민국의 월급쟁이 대부분이 집 한 채가 자산 아닌가. 

그러나 나는, 내 친구의 친구일 뿐 그 남편의 친구가 아니었다. 죽고 싶다는 내 친구를 살리는 게 급선무였다.    “남편은 남편이고 너는 너잖아. 남편이 너를 원망해도 너는 너를 사랑해야지. 자책하지 말고.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이사 간 거 아니잖아. 같이 맑은 공기 마시고 꽃도 키우면서 살자고 간 거지. 남편 마음도 이해는 간다만 부동산 정책이 나쁜 거지 니 탓은 아니야. 네가 고위공직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닌데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남편은 잠시 놔두고 너를 챙겨. 아프면 큰일이니까 밥 잘 먹고. 우울하면 나가서 걷고. 아프면 너만 힘들고 너 죽으면 세상 끝이야.”

  친구에게 열심히 말했다. 자책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중요하니까. 그리고 이 말은 나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친구와 나는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 오래 살았다. 터줏대감처럼 그곳에 있다가 몇 해 전 비슷한 시기에 둘 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나왔는데, 나와보니 고향 좋은 줄 알게 됐고 그래서 돌아가려고 했더니만 이미 집값이 폭등해 버린 것이었다. 우리 둘 다 친정은 여전히 그곳이었으니 만나기만 하면 왜 그 동네에 집을 안 샀을까 한탄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미 엎질러진 물을 놓고 무슨 소용이람. 이제는 그 엎질러진 물이라도 마시면서 잘 살 수 있도록 힘을 내야 할 때였다. 같은 처지이다 보니 친구의 하소연은 나의 하소연이었고, 내가 친구에게 한 말은 조언인 동시에 나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집을 놓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건 집 문제뿐이 아니었다. 살면서 내가 한 선택이, 그 결과까지 예상과 맞아떨어진 게 얼마나 될까. 처음 보는 식당에 간 것과 비슷했다. 뭘 먹을지 메뉴는 내가 골랐지만 그 맛은 주방장 마음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맛있고 때로는 돈이 아까웠었다. 

  인생사도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을까.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최선의 길이 지나고 보니 좋았던 적도 나빴던 적도 있었으니까. 도중에 있을 수수많은 변수를 누가 예측할 수는 있을까. 그런데 결과가 나쁠 때마다 자신을 탓한다면, 일이 안 풀려서 안 그래도 속상한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게 아닌가. 다그치면서 자신을 단련시키겠다는 발상은 어릴 때나 하는 것이지, 쓴맛을 볼 만큼 본 중년이 할 짓은 아니다. 차라리,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면서 위로하는 편이 낫다.      

  흔히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심지어 인류를 사랑하라는 좋은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라’는 중요한 말은 깜빡하곤 한다. 이제라도 자신을 탓하지 말고 위로하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면 어떨까. 이기주의와는 엄연히 다른, 어떤 상황에서든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함양시키는 자기애다. 잘한 것은 칭찬하고, 못한 것은 반성도 하겠지만 공들여 다독여줘야 오래 버틸 수 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세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제 못난 탓에 죽는 세상이 돼서는 안 될 테니까.    

   어제였다. 친구와 카톡을 했다. 지난번 통화 이후로 자책하는 일이 줄었고 답답할 때면 동네 뒷산에 간다고 했다. 웃는 이모티콘 따위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한시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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