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이 많지 않다. 특별히 즐거웠다거나 슬펐다거나 하는 일도 별로 없었고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간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으니까. 아빠는 정신없이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집에서 종일 일을 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 그때야 아이니까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부모도 정말 수고가 많았다.
그래도 겨울이 되면 또렷이 떠오르는 훈훈한 추억이 있다. 나도 동생도 초등학생이었다. 엄마랑 손을 잡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명동에 갔다. 사람이 엄청 많았다. 어두운 밤거리도, 그 거리를 비추는 반짝이는 불빛도, 거리의 노랫소리도 모두 별세계였다. 나의 동네에서 보던 세상과는 또 다른 신비한 곳.
그날 명동 성당을 처음 가봤다. 엄마는 우리 손을 이끌고 성모마리아상과 예수의 말구유가 있는 성당 구석구석을 보여주었고, 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성당은 아주 컸다. 보기 드문 멋진 서양식 건물이었으니 동화속 집과 닮은 것이 신기했다. 지금은 여든 나이가 되어 거동도 불편한 엄마. 그때는 모처럼 차려입은 모직코트에 머리에는 당시 유행이었던 스카프를 매고 날렵한 발걸음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아련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네.
거리에는 촛불을 켠 좌판이 늘어서 있었던 것 같고. 사탕, 인형, 악세서리들을 팔고 있었겠지. 우리는 구경을 하면서 성당 앞에 있던 작은 레코드점에 들어갔다. 엄마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어린이 동화 테이프를, 동생은 뭐였을까, 무슨 만화주제곡 테이프를 골랐다. 어두운 조명의 작은 그 가게에서 벽면 가득히 꽂힌 테이프를 보면서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그것을 고르면서 신났고, 선물로 받아들고는 집에 가서 들을 생각에 기대가 됐다.
성당에서 백화점으로 난 큰길을 걸었다. 도중에 인생 최초로 포장마차란 곳에 들어갔다. 찬바람도 잠시 피하고 속도 채울 수 있는 곳. 겨울이니까 오뎅, 우동, 떡볶기 등 보통 포장마차 메뉴들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시커먼 홍합! 그릇 안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고 국물이 아주 뜨끈했다. 그릇을 부여잡은 손가락이 따뜻해지고 그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온몸이 녹았다. 후후 불며 마신 그 국물은 짭조름한 맛이 아주 좋았다. 먹는 것에 통 관심이 없었던 나였지만 '어! 홍합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하며 놀랐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겨울철 홍합국을 끓일 때면 꼭 그때 기억이 난다.
너무 옛날이라 그날의 일정은 더 이상 남아 있는 게 없다. 살면서 그 좋은 순간을 계속 되새김질했다면 더 많이 남아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이게 끝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동화테이프 <바보이반>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키득키득 거렸다. 혹은 <장화 신은 고양이>였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성우들의 허풍스러운 연기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한동안 펫분의 '화이트크리스마스'를 자주 틀었다. 동생과 내가 만든 작은 트리와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장식품들과 함께 집에는 크리스마스 기분이 가득했었다. 시판되는 멋진 트리는 아니었지만, 오리고 붙이고 그 장식을 하면서 많이 웃었다. 겉모습은 조잡했을지 몰라도 그 마음만 보자면 롯데월드의 찬란한 트리 부럽지 않았다. 마음도 즐겁고 평화롭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사는 것이 그리 팍팍하지는 않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니 그때는 참 좋았구나 싶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어서일까. 젊은 엄마와 어린 나와 동생이라니.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이. 어느샌가 올해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갑자기 많은 것들이 아쉬워진다. 이래서 우리 엄마가 옛날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일까. 그래도 나는 해야지. 좋은 것들을 진짜로 잊어버리게 되면 더 아쉬울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