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디오소년 Jul 07. 2023

이별공식

우리가 헤어진 이유

K와 이별했을 때 주변인들은 우리가 주연한 드라마에 과몰입 상태였다.




“아아…. 결국 헤어지네. 그래도 잘생긴 애랑 사귀어봤잖아. 부럽다 야.”

그들은 짧은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러나 내 쪽에서 먼저 찬 것을 알고는 곧 태세를 달리했다.

“네가 아주 배가 불렀구나. 다 잡은 물고기를 놔줘?”

시청자 게시판에 소감문을 써 내려가듯 비평과 비난사이를 아슬하게 비켜갔다.


여태 누렸던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했다.


K의 짙은 쌍꺼풀과 소처럼 크고 맑은 눈을 사랑했었다. 친구들의 감정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는 술자리에서 조차 빛이 났다. 애석하게도 알코올 분해능력이 없어 꽐라 되기 일쑤인 여자친구를 살뜰히 보필했고, 동기의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주면서 매력을 굳혔다. 자분자분 말하고, 말캉말캉 감성을 소유한 K와 나란히걸으면 우쭐한 기분이 흘러넘쳤다. 어느새 그의 명함이 나의 자부가 되었다. 취미가 같아서 좋았던 노래방 데이트는 다른 누구를 만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작은 방하나는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길을 걷다 K가 부르던 ‘플라워’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특유의 비성이 섞인 서글픈 그의 목소리를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겠구나….


우리의 이야기로만 채워지던 여름밤은 바래고 희미해져 갔다.








남녀가 헤어지는데 이유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은 애초에 어리석다. 누구보다 그를 좋아했고, 좋아하는 감정이 소멸되었으니 만날 이유가 없다. K는 1남 2녀 중에 막내였다. 그리고 그는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난다'는 말에 가장 부합한 생명체였다. 순수함에 경계가 없어 받는 것도, 제가 가진 것을 내어주는 것도 유연했다. 순진한 것과는 달랐다.


K의 집에 저녁손님으로 초대된 날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화목한 집안 분위기에 한번, 다정한 부모님의 말투에 겸연쩍어 입꼬리가 내려오질 못했다. 어색해하는 나를 살펴 K의 아버지는 손때 묻은 앨범을 꺼내 보이며관심을 끌었다. 앨범을 펼치자 세 자녀의 백일사진, 돌사진이 시간의 흐름순으로 붙여져 있었다. 발가벗은 K가 고추를 내놓고 하얗게 웃는 사진을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누나들과 옥신각신했다. 그리고 나는 보고 또 보았을 사진일 텐데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한 그의 부모님 옆에서 연신 오렌지주스를 홀짝였다. 찰나였지만 선명하게 느꼈다. 나는 결코 이들과 섞일 수 없을 것만 같은 이질감,  견고하게 쌓인 벽에는 도무지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행복일까? 도둑맞은 나의 행복이 슬펐다.


갑자기 신트림이 나왔다. 부유하고 있던 행복한 공기에 체한 건지, 잘 먹어 예쁘다는 말에 '제가 이 집에서 해 드릴건 그것밖에 없답니다.'하고 밀어 넣은 잡채 때문인지 몸에 이곳저곳이 으슬으슬 아파왔다.


K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허술한 우리 집을 소개한다고 떠날 사람이 아님을 알지만, 사랑이 연민으로 옮겨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상처 입었던 맨살에서 진물이 흘렀다. 행복한 사람을 만나면 내 상처가 치유되는지 알았는데…. 스스로도 풀지 못한 숙제를연인에게 안길 순 없었다.


나는 감정의 요동이 일지 않는 대낮에 그와 이별했다.








언제부턴가 락발라드 잘 듣지 않는다.


서글프고 절절한 노래만 듣던 내가 산뜻한 박자에 톡톡 애교 섞인 달콤한 보이스를 찾아 듣는다.

언젠가 누군가의 블로그를 타고 들어갔다가 우리는 왜더 이상 락발라드를 듣지 않는가! 에 대한 단상을 발견했다. 나는 혹자가 '한물갔다'라고 말한 것보다 '더는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적어도 내게 있어 락발라드는 청춘의 몸짓이었고, 여름의 끝자락을 청량하게 장식해 준 풍경이었을지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대배우(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