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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peltina Feb 20. 2024

그래, 나 T다!

용기보단 합리적인 근거

지난번 미룬 재계약서류가 또 스믈스믈 화두에 오르기 시작했다.

늘 본인 일로 바쁜 우리 보스는 이럴 때나 한 번씩 업무미팅을 부랴부랴 잡아준다. 

참, 사람은 좋은데... 일 적으로는 영 스타일이 안 맞는다.



마지막이길 바라는 수정 파일명.. (출처. https://blog.naver.com/davidgrammm/110183028824, /pure_pearls/223287949260)



벌써 1년 전부터 교정까지 끝내고, 컨펌만 좀 해달라고 보낸 논문이 오리무중이다.

이번에도 새로 쓰고 있는 논문에 대한 얘기만 나눴을 뿐, 남편이 아픈 와중에도 수정해서 보냈던 진짜레알찐최최최최최최최종 버전의 논문에 대한 얘기는 꺼내 보지도 못했다.


"저기, 내가 12월에 보냈던 논문 말이야"

"아! 티나, 내가 요즘 너무 바빠서 최대한 빨리 보고 꼭 답변 줄게"

"그래그래 너 바쁜 거 알지 내가 아하하... 

 그럼 우선, 이번 논문부터 나는 마무리하고 있을게"

"Very nice~"


베리나이스는 얼어 죽을. 

벌써 2월 말인데.. 빠르게 다가오는 퇴사일에 나만 또 조급하지 또. 



 

퇴근길에 문득, 이렇게 하다가 괜히 또 퇴사 예정일 한두 달 전쯤에나 되어서, 슬그머니 논문 진행 상황을 핑계로 묶이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물론 초반에 퇴사를 결심했을 때랑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걱정보단 뭐 기대감 같은 거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오빠가 아프니, 이제 내가 직업을 내려놓는 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고. 

한 번도 신청해 본 적 없는 프랑스 실업급여 제도가 잘 작동하려나 우려도 되고.

잘 나가던 커리어 내 손으로 끊어냈다가, 다시 돌아오지도 못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붙잡아 때, 이기는 잡혀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랄까.




"누난 지금 용기가 필요해"

"맞아, 여본 용기가 필요해"


심란한 마음에 꺼낸 이야기에 한국에 있는 두 남자가 난리다.  

두 사람의 지지에 마음은 따뜻해지긴 하는데, 영 께름칙한 느낌은 가시질 않는다.


나는 정말 용기가 필요한 걸까?

퇴사가 과연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일까? 

생계가 달린 문제를 용기로 내지르는 게 맞나?


나의 시원찮은 반응에 둘은 금세 시무룩해진다. 

방금까지 세상의 '용기'담은 반짝이던 4개의 눈동자는 '서운함'을 담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또 뭔가 내 반응이 부족했나 보다 싶긴 하지만, 

해결이 안 된 걸 해결 됐다고 할 순 없지 않나 싶은 생각에, 슬그머니 눈치만 보며 눈알을 굴렸다.  


"뭐가 걸리는 건데?"


조용히 듣던 둘째가 무심히 툭 물었다.


"뭐 걸리는 게 있으니까 망설이는 거 아냐?"

"글쎄. 아무래도 근무조건이 편한 직장이기도 하고, 당장 월급도 따박따박 들어오기도 하니까."

"그럼 왜 그만두려고 했던 건데?"

"일단 논문 프로세스가 너무 느려서 커리어 쌓기에는 별로라서. 전공을 좀 바꿔보고 싶기도 하고. 
 그리고 또, 음.. 오빠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한국으로 있게 준비할 시간도 필요하고"

"그럼 실업급여 나오는 것만 확실시되면, 답은 나온 거 아냐?"


생각해 보니 그렇다.

어차피 계약 연장을 하더라도, 여기 속도로는 도저히 한국으로 돌아갈 실적을 채울 수가 없다. 

그러면 언제 다시, 아픈 오빠와 떨어져 롱디로 지내야 할지 모를 위험을 늘 감수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근무조건이 편한 직장인거지 좋은 직장은 아니다.

게다가 현재 참여하고 있는 논문들로 내년 1년 공백만 좀 매워지면, 다시 돌아오는 일도 불가능은 아닌 것 같고.


단호한 결정이 섰다. 

이제 마음 편히 퇴사일을 준비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네, 됐네. 그만두는 게 맞네."  


아까와는 다른 확신에 찬 내 대답과 표정에, 

아까보다 더 서운해진 두 궁극의 F들이, 이젠 아예 대놓고 상처 서린 눈빛을 보낸다.


그치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용기보단, 근거가 필요했던 궁극의 T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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