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휴, 죽일 놈의 책임감
"티나, 내일 오전에 잠깐 보자 5분 정도만!"
나의 보스는 꼭! 저렇게 사람 마음이 불편한 말을 던지고 간다.
아니, 5분 정도면 지금 말하던지, 내일 볼 거면 어떤 얘긴지 추측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던지!
매번 흔들리지 말자 스스로 다짐하지만, 나는 늘 저 한마디에
'무슨 얘길까? 무슨 일이지?'
라는 걱정 속에서 내일이 오기까지 도망치 지를 못한다. 노예근성이다. 아님 쿨하지 못하던가.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출근을 했다. 출근일이 딱 12번 남은 시점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고민이 안될 턱이 있나. 보스가 출근하는 9시 반이 되자마자 "하이, 하와유"라는 인사말과 함께 방문을 두드렸다.
"티나, 센터장님이 새로 시작된 프로젝트에 함께 했으면 싶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해 무슨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어쩐지, 퇴사가 12일밖에 안 남았는데 인수인계자가 배정이 안되더라니'하는 생각이 번쩍 스쳤다.
'아니, 근데, 이게 5분 정도만 볼 얘기라고?'
하는 억울한 생각과 함께, 매번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행동들을 하니 내가 저 사람 한마디에 흔들리는 건 당연하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결심한 퇴사인데 이렇게 흔들릴 수는 없었다.
"미안해. 나도 이런 제안이 매우 영광이야. 하지만 내가 지금처럼 지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기엔 3년은 너무 길어. 아마 주변사람들에게 불편함만 줄 거야. 정말 다시 한번 고맙지만, 안될 거 같아."
책에서 모범답안으로 나올 것 같은 형식적인 거절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여러 개의 제안을 다시 해왔다. 나도 예의상, 잠시 고민하는 척과 함께 모두 거절했다.
"그럼, 이건 어떠니?"
"?"
드디어 이 불편한 대화가 거의 끝났나 싶을 때쯤, 그녀가 회심의 한방을 날렸다.
"지금 네가 핸들링하는 논문이 3개나 되잖아. 이걸 그냥 두고 나가면 마무리하는 게 쉽지 않을 거야. 3개 모두 거의 다 끝나가니까 투고하고 리비전 하는데 최선을 다해보자. 그럼 한 6개월 정도면 될 거고. 딱 이번학년이 끝나는 타이밍이기도 하고. 어때?"
"..."
"네가 마무리 안 하면, 이 논문들 언제 투고할 수 있을지 나는 사실 모르겠어."
마지막 문장은 분명 협박이었다.
나야 이 일을 하네 마네 하는 상황이라지만, 함께 일해 준 박사과정 아가들의 경력에 대한 책임감을 묵직하게 얹어주는 협박. 그녀가 알지 모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협박에 약하다.
"좋아. 대신 내년 6월까진 다 마무리될 수 있도록 너도 많이 도와줘"
"그럼 당연하지! 좋아! 계약서와 서류처리는 이쪽에서 마무리할게"
문을 닫고 나오는데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내가 세상에 타협한 걸까?'
'결국 나는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나?'
'이러다 계속 은퇴 전까지 이일을 하는 건 아닐까?'
온갖 생각들이 몰려왔다.
생각의 대부분은 결국 '나 역시, 현실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구나'에 해당하는 자조적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과 싸워보겠다며, 나를 믿고 함께 해준 저 아가아가한 박사과정 학생들의 노력까지 망칠 순 없었다. 저 아가들한텐 이 논문이 다음 관문의 열쇠가 되어 줄 수도 있으니.
나이와 위치가 올라갈수록 책임이 많아진다더니..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퇴사조차 오롯이 나만 생각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구나 싶어 입이 씁쓸했다.
한자리 수가 되어가던 나의 퇴사 디데이는, 이렇게 또다시 세 자릿수.
글을 쓰는 지금, 오피스 문 밖에서 까르르 거리는 박사 아가야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넨 알까, 너희에 대한 나의 이 애증을!!!!
아, 진짜 실업자 되기 겁나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