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통쾌함 기록하기
퇴사와 관련된 글을 메거진으로 묶으면서 이건 너무 감정적인 글은 아닌가? 하는 고민들을 하게 된다. 그래서 보통은 열심히 써 놓고도 작가의 서랍 속에서 조용히 잠들게 하지만, 오늘은 소심한 내 마음이 모처럼 시원해졌으니 꼭 기록해야지! 시원한 사이다 사진까지 넣어서! 프랑스에 와서 일을 하면서 나에게 이런 소소한 통쾌함은 실로 꽤나 오랜만이니까:)
사건의 발단은 1달 전부터.
내가 온 첫날부터 날 싫어하던 아그네스가 웬일로 꽤 오랜 시간 모습이 보이질 않더라. 센터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정처리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 그녀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내심 궁금은 했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이곳 사람들도 다들 짠 것처럼 아그네스에 관련된 얘기만큼은 함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왜 안 보이는지 물어보기도 좀 그랬다. 그리고 뭐, 걔가 안 보이면 나야 편하니까.
내가 이토록 그녀를 미워하게 된 사건은 4년이나 흐르는 동안 소소한 것들까지 합하자면 꽤나 많이 누적되어 있기 때문에, 큰 사건 2가지만 말해보고자 한다.
학회 발표자로 초청이 된 일이 있었다. 그런 경우 발표준비와 더불어 학회 신청이며, 초록등록이며, 다양한 행정처리들도 진행해야 하고, 연구팀 대표가 되는 일인 만큼 센터장님과 보스와의 미팅도 잦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학회기간 동안 지내야 할 호텔 방 예약을 위해 센터에서 부여받은 아이디와 비번으로 전용 예약 페이지에 접속을 했는데, 계속 거절이 됐었다. 홈페이지 쪽 고객상담센터에도 문의했으나 따로 답장을 받을 수 없어 불가피하게 아그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스케줄에 시간이 조금만 널널했어도 내가 했다!!!!)
"아그네스, 정말 바쁜 와중에 도움을 요청해서 미안한데, 이번 학회 관련해서 숙박예약에 문제가 생겼어. 너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
라며 시작한 나의 이메일을 읽고 2~3일간 아무런 응답이 없던 그녀는,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하는 내 이메일에 틱 하고 이미 예약완료된 호텔바우처만 덜렁 첨부된 이메일을 보냈다. 그녀가 예약해 준 호텔은 학회행사장과 거리도 멀고 (대중교통으로 30~40분 떨어져 있었다), 그 더운 여름에 에어컨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여관방보다도 초라한 호텔이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찾아가 아주 공손한 태도로 호텔 변경을 해야 할 것 같으니 내가 변경할 수 있도록 사용 가능한 아이디와 비번을 알려달라고 말했다가
"티나, 왜 나를 귀찮게 하는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젠데? 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라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그녀를 마주해야 했다.
첫 발표자라 일찍 학회장에 가야 하는데 거리가 너무 멀다는 나의 이유는 그녀에게 생색이나 내는 까탈스러운 외국인 따위가 되어버렸고,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은 채 화만 내는 그녀와 무의미한 입씨름을 할 힘이 없었다. 나는 결국 학회 기간 내내 늦지 않기 위해 아침 6시 반부터 사비로 우버를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더 화가 나는 건, 그 당시 학회장에서 만난 다른 센터 직원들의 호텔은 학회장 근처의 4성급 호텔 한 곳에 모두 함께 예약이 되어있었으며, 심지어 왜 나만 따로 예약되어 있는지 다들 이해가 안 된다며 안타까워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에 대해 보스가 아그네스에게 학회에 돌아와 의문을 제시했을 때 역시,
"티나의 취향을 생각해 내가 고민해 골라준 호텔이었어"
라는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뻔뻔함으로 일관해 나의 화를 더 돋우기만 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와 아그네스가 날을 세우게 된 사건이 바로 이 한국 학회 사건이었던 것 같다.
일을 하고 2년 차가 되었을 때쯤, 센터에서 늘 참여하던 학회가 한국에서 열렸었다. 내가 센터 내의 유일한 한국인이기도 했고, 해외초정발표자까지 선정된 터라 대표로 참석을 하기로 했었는데, 오랜만에 다녀오는 한국 일정이 행복하긴 했지만, 출발 전부터 다녀와서 경비를 환급요청 하는 과정까지 내내, 행정처리 단계 단계마다 아그네스의 시비와 비아냥에 질려 죽을 지경이었다.
"티나, 한국은 서류형식이 왜 이래?"
"티나, 영수증이 죄다 한국어야. 너네 나라는 왜 이래?"
"티나, 한국서류들이 엉망이라 내가 일이 안돼!"
"티나, 니가 요청한 경비에 절반도 줄 수가 없겠다."
그녀가 지적한 것들은 주로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던 데다가, 일일이 프랑스어로 포스트잇까지 붙여 차곡차곡 순서에 맞게 제출했건만 사사건건 '한국'이 문제라는 식의 발언은 결국 2년간 참아왔던 설움이 터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해외살이를 하다 보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결국 나는 나의 조국을 욕하는 그녀에게 친절한 티나 씨에서 벗어나 단호한 어투의 장문으로 된 이메일을 썼다.
"아그네스, 원본이 필요한 항목에 따라 제출했을 뿐이야. 너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기 위해 프랑스어로 표시까지 해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들을 하게 돼 유감이다. 더 필요한 사항이 있다면 정중하게 요청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걸 처리하는 건 너의 일이고, 나는 오히려 지금 너의 일을 돕고 있는 중이니까."
이 장문의 이메일 이후, 그녀는 날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사실 이건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편하게 느껴졌었는데, 문제는 그 이후엔 그 어떤 행정처리도 다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학회를 다녀오기 전부터 그녀에게 문의해서 받은 안내만큼의 경비를 사용하고 환급신청을 했건만, 그 조차도 그녀는 영수증이 한국어라, 사용한 카드가 한국카드라, 식당이 한국식당이라, 등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걸며 의도적으로 환급절차를 차일피일 미루고 주지 않았다. 결국 내가 10개월쯤 뒤에 센터장님과의 면담에서 이일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한 이후에야
"어머, 티나가 저에게 직접 요청을 하지 않아 몰랐어요."
라는 핑계를 시전 하며 그마저도 내가 제출한 영수증 금액의 일부만을 환급해 줬다. 이 또한 내가 금액을 잘못 안내받았는데, 그걸 몰랐던 내 잘못이라나.
그 밖에도, 당장 발표 준비를 세팅해야 하는 상황에 빔 프로젝터나 레이저포인터 등을 요청하러 갈 때마다, 프랑스어로 말해야 준다고 하면서 시간을 끌어 애를 태운다던가 (우리 센터는 영어가 공용언어로 사용되는 센터이다.), 학회신청 관련해서 보험서류제출을 본인이 깜빡해 놓고 내가 챙기지 않았으니 니 문제라고 하며 책임을 떠넘긴다던가 하는 등의 소소한 악행은 셀 수 없이 많아 더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다. 사실 내가 이곳에 온 첫날,
"안녕. 이번에 한국에서 온 티나야. 잘 부탁해."
"한국? 어딘지 모르겠지만, 귀찮은 행정처리가 필요한 저기 동양의 어느 나라인가 봐?"
라고 대답한 그 순간부터 그녀는 나랑은 잘 지낼 수가 없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정을 한다'는 그녀의 업무가 가히 절대적 권력을 가지는 일이며, 그 업무 덕에 센터 내에서 그녀의 입지도 두텁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싸우기를 포기한 채 고구마만 삼켰던 것이다.
이야기가 멀리 돌아왔지만, 여하튼 이런 고구마 같은 사건들을 겪으며 그녀는 나에게 기피대상 1호일 수 밖에! 그래서 사실 나는 한 달 전부터 안 보이는 그녀의 안부 따윈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지만, 그녀가 언제 돌아오는지는 궁금했다. 퇴사엔 엄청난 행정처리가 필요하니까. 이왕이면 그녀가 안 보이는 동안 처리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어제, 안보인지 한 달이나 넘은 이 시점에서야 우리 센터의 마당발인 제니퍼에게 넌지시 질문을 했다.
"제니퍼, 아그네스는 언제 돌아오는 거야?"
나의 질문에 꽤나 흥미로운 표정을 짓던 제니퍼는 이건 '탑 시크릿인데..'라는 말과 함께 내가 더 묻지도 않은 아그네스에 대한 많은 정보들을 쏟아냈다. 내가 그녀에게 받은 상처에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려 애를 썼던 그동안, 사실 아그네스가 센터장님과 다른 교수님들에게 질책을 받을만한 일들이 발각됐었다는 것부터, 그 덕분에 시말서를 여러 장 써야 했던 일, 그리고 나 외에도 다른 국가에서 온 직원들의 항의가 보고된 일, 기타 여러 일들에 대한 책임을 질책받다가 돌연 건강상의 이유로 병가를 쓰겠다고 했는데 그게 거절된 일, 그래서 결국 퇴사까지 했더라 라는 얘기까지.
사건 하나하나도 다 충격이었지만, 내가 이곳을 그만둘 때까지, 언제까지나 절대 권력일 것 같은 그녀가 결국엔 스스로 한 행동들 때문에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아 묘한 허탈감과 함께 짜릿함과 통쾌함이 연이어 몰려왔다. 게다가 제니퍼 말에 따르면, 나 이외에, 얼마 전 입사한 몽골에서 온 직원과 태국에서 온 직원에게도 비슷한 행동들을 보여 그에 대한 경위서 또한 작성했었다고 한다. 아무도 뭐라 한 사람은 없지만, 괜히 나 혼자 민감했던 것이 아니란 걸 증명한 것 같아, 내심 울컥함과 함께 억울함이 풀리는,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조금은 모니터 앞에 기도문까지 붙여가며 그녀를 용서하기 위해 애를 썼던 시간시간들이 떠올라, 약간의 죄책감도 들기도 하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나는 솔직히 그 보다 퇴사 전 이런 권선징악을 보게 돼 행복한 마음이 더 크다.
물론, 글로 쓰면서 이런 거에 참, 이렇게나 기뻐하고 위로받은 내가 참 소심하고 못났다 싶은 마음도 든다. 하지만 이 또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보는 장면이지 않을까 싶어 살포시 남겨보기로.
힛, 뭐 어찌 됐든, 제가 주문한 적 없는 사이다지만 잘 마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