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게 뻔히 보이는 시험을 피하지 않은 용기

망한 뉴토플후기

by papeltina

망할 걸 이미 알고 있던 토플시험이 지지난주에 끝났다. 결과는 역시나 폭. 망.

사실 안 될 시험이란 걸 알면서도, 시험 전 3일을 몽땅 휴가를 냈었다. 최근 센터에서, 내내 말도 안 되는 일정들로 일을 처리하던 터라 지쳐 있기도 했고, 시험 전에 기출문제라도 좀 풀어보고 들어가고 싶었던.. 죽어가는 시험 점수를 살리고자 했던 나름의 내 마지막 발악이었달까.


하지만 휴가를 쓴 첫날부터 알았다. 이번시험은 애당초 소생 불가능 하다는 것을.

휴가 첫날 수요일 아침, 버릇처럼 확인한 메일함에는 긴급으로 요청메일이 와 있었다. 최근 인수인계를 마무리해 가던 동료에게 추가로 전달받아야 할 인수인계리스트였다. 프랑스는 보통 휴가 때 일 요청은 절대 안 하는데, 이렇게 할 정도면 꽤나 중요한 일이란 소리였다. 어쩔 수 없이 금요일 오후 3시간 정도는 센터에 나가 근무를 해야 했다. 수요일과 목요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보일러가 고장 나고, 냄비가 타버려 이케아를 다녀와야 했고, 두어 달 전부터 요청했던 약이 하필! 딱! 이때에! 약국에 도착했다는 연락도 와서 번화가에 있는 약국도 다녀와야 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휩쓸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금요일 밤이었다. 원래 시험이나 발표 전날이면 편히 잠을 못 자는 성격이지만 이번엔 어차피 망한 시험이라 그랬는지 잠도 푹 잤다.




뉴토플 후기


올 7월인가 8월 이후로 바뀐 토플은 꽤나 리스닝이 중요해진 느낌.

리딩을 제외하고, 스피킹 통합유형에서도 리스닝이 꽤나 중요했고, 라이팅 통합유형에서도 리스닝은 필수.
리스닝파트야 뭐.. 근데 공부를 안 해서 그랬는지 가뜩이나 안 들리던 지문이 더더 어렵게 들렸다ㅠ

리딩과 라이팅은 훨씬 수월해졌음.
더미지문도 없거니와 화면 배열도 살짝 바뀌어서 시간도 훨씬 잘 보이고. 무엇보다 시험 전체시간이 짧아져서 그런지 덜 힘들었음. 라이팅도 통합형은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독립형에서 에세이 대신 간단하게 주장과 근거만 나열하면 돼서 좀 편했다. 물론 편했다고 해서 점수가 잘 나왔단 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논문을 보던 가락이 있어서 인지 공부를 안 한 것 치고는 리딩은 꽤 수월했다. 하지만 역시나 문제는 리스닝. 이 리스닝 실력으로 일을 하고 있다니! 가히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 당일날 아침 급하게나마 외워서 들어간 Fun and exciting 템플릿과 과거 경험 템플릿은 스피킹 시간에 써보지도 못한 채 끝. 그나마 제일 발전했구나 느낀 건 그나마 쓰기 영역. 주제가 어렵지 않았고, 에세이가 토론문으로 바뀌면서 스스로 부담감이 덜해서 그랬는지 예전보다 뭘 더 많이 쓰고 나왔다. 뭐,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리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무책임한 보스와 일하면서 어마어마하게 써댄 영어이메일과 논문 관련 문장들이 아주 쪼오오오~끔 도움이 된 것 같기도.


어쨌든 그랬어도, 시험 당일날 아침엔 준비가 안 됐단 생각에 정말 시험장에 들어가기 싫었던 건 사실.

아침밥도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고, 기껏 낸 휴가에 3시간 동안 왜 사서 고문인가 싶기도 하고, 시간도 아깝고, 괜히 가다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까지.

결국 30대 중반이 된 지금도, 나는 실패를 마주하는 용기를 가진 어른은 못됐다.


"언니, 일단 가보고, 가다가 정 못 들어가겠으면 바게트나 사서 돌아와."


밍기적거리며 출발을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보고, 눈치를 챘는지 동생이 툭 등을 떠밀어줬다.


"나 산책 갈 건데, 입구까지 같이 가자."


어느새 나갈 채비를 마친 남편도 성큼성큼 다가와 겉옷과 신발을 꺼내줬다.

눈치 빠른 두 사람 덕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간 거긴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실패를 피하지 않은 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반쯤 떠밀려 출발한 이후엔 의외로 시험을 보고 나올 때까지 모든 과정들이 후르륵 흘러가 생각보다 괴롭진 않았다. 고사장에 들어가고, 신분증을 검사받고, 시험을 보고, 하는 시간들이 그냥 덤덤하게 흘러갔다. 실패를 예상하 던 출발 전이 괴롭지, 정작 실패를 하는 과정의 시간들은 크게 힘들지도, 속이 쓰리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을 견디고 난 후, 시험을 끝낸 스스로가 대견하고 나름 잘 본 영역도 있단 생각에 뿌듯하고 가벼운 느낌.


나의 실패의 30만 원은, 의외로 이렇게 또 완전한 실패는 아닌 30만 원이 된 기분.

나의 퇴사도 막막하기도, 때론 두렵기도 하지만 막상 그 과정이 이번 토플경험처럼 잔잔할 수 있기를!

어릴 때부터 느낀 거지만, 역시 주사는 맞기 전 줄 서있을 때가 제일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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