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본 적이 없어서..

퇴사 56일 전

by papeltina

요즘 나의 최대 고민은 '내게 주어진 1년을 어떻게 보내야 잘 쉬었다고 소문날까'이다.

엄청 즐거운 고민 같아 보이지만, 사실 매우 어려운 고민. 적당히로는 소문나기 쉽지 않지.


그냥 막 여행 다니고 운동하고 놀고 자고 먹고만 하자니, 실업자로서의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모처럼 얻은 시간을 영어니 프랑스어니 그림이니 자격증이니 하는 것들로 채우면, 어떤 일로 복직하든 첫 출근날 아침부터 억울하고 아까울 거 같다. 가장 좋은 건 적절히 배분하여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이 경우엔 이도저도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결정을 해야 해!




어릴 때 나는, 백화점도 지하철도 없는 작은 소도시에 살았었다.

초등학교 때였나, 엄마가 빵속에 치즈가 든 피자를 사주겠다며 데려간 서울 어느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처음 탔다. 반짝반짝했던 백화점도, 맛없는 피자 가생이 빵속에 치즈가 든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 에스컬레이터가 제일 기억에 남았다. 내가 한 발짝만 내디뎠을 뿐인데 어느새 주-욱 올라가 다음층에 도달하는 신기한 계단. 문제는 내릴 때. 똑같은 한걸음인데 내릴 땐 넘어질까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다. 올라오면서 약간의 속도감이 붙기도 했고,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두리번거리다 내리는 타이밍 찾기도 어려웠다. 요즘의 나는 종종 그때의 기분이 생각난다. 처음 에스컬레이터를 탔던, 그리고 내렸던 그날.


유치원부터 초등학생,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로, 거기에 석사를 지나 박사까지.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처럼 나는 대한민국 교과과정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단계를 단 한 번의 일탈도 없이 다 끝 마치고 여기까지 두리번거리며 주-욱 이동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끝에서 길을 도통 모르겠다. 내리는 타이밍이 맞는지도 늘 불안하고.


아마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유치원에 들어선 그 한 발짝 이후부턴 에스컬레이터의 시작이다.


"어머 어머님, 학교 가기 전엔 한글은 떼야해요!"

"어머, 중학생이면 고등학교는 어디로 갈지 정해야지. 그래야 준비할 수 있어."

"야, 너네도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야! 곧 수험생이야 수험생!"

"취직하려면 대학교 1학년부터 빌드업해야 해. 대외활동도 관련된 걸로 쌓아야 하니까!"

"잘해 왔는데.. 박사 할 거지?"


언제나 단계를 올라가도 늘 휘몰아치듯 다음, 다음, 그리고 또 그다음엔 어디를 갈지, 어떻게 할지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 그 속에서 '준비된 인재'로 보이기 위해선 답이 필요하다. 내 다음은 어디인지에 대해서.

내 경험에 따르면, 이 모든 과정은 늘 진로상담시간인 30분 내외로 다 끝이 났다. 정말 효율적이고 빠르게. 잠깐이라도 이게 맞는지 고민하고 머뭇거리다간 모두가 빠른 상황 속에서 혼자 낙오되는 듯한 기분을 맞닥뜨려야 했다. 나는 그게 싫고 무서웠다. 그래서 효율적이고 빠르게 30분 내에 고민하고 결정해, 내 다음의 목표를 정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러고 나면, 이렇게 결정된 목표는 나에게 한 시절동안 늘 해야 할 일들을 끊임없이 제공해 줬다. 정신없이 목표가 쥐어준 과제들을 하나 둘 해치우다 보면 고민도 걱정도 필요 없이 다음단계에 안전하게 도달했고.




그렇게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6살에 탄 에스컬레이터에서 3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주-욱 타고 있기만 했다. 고민 없이 다음 목적지를 도착할 수 있는 단계의 끝이 왔구나 실감은 하지만, 내리는 법을 몰라 우물쭈물이다. 다음이 없을 땐 뭘 해야 하는지 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퇴사를 결정하고 진행되고 나면 기쁘고 신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벌써부터 점점 불안함과 조바심이 커져만 간다. 퇴사 56일 전의 나는 너무 빨리 내딛어도, 반템포라도 늦어져도, 넘어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오늘도 발을 동동 거리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프랑스에서 퇴사는 처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