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월 Nov 14. 2023

냉장고는 파먹혔다

우리집엔 늘 먹을 게 없다

물건을 잘 사진 않지만 잘 버리지 못해 맥시멀리스트가 된 내가 가진 유일한 미니멀한 공간, 바로 냉장고다. 음식을 쟁여놓지 않기에 냉장고는 항상 쾌적하다. 어느 살림꾼의 유튜브에서 하는 말이 짐은 항상 공간의 70% 정도만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유 공간이 있어야 물건에 제압당하지 않고, 정리하고자 할 때 바로 정리할 수 있고, 하다못해 손님이 갑자기 왔을 때는 때려 넣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유지하고 있었던 공간, 냉장고. 4인가족이 외식이나 배달없이 사는데도 기특하게 산뜻함을 유지하고 있는 내 냉장고. 냉장고를 파먹는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집 냉장고는 이미 파먹혔다.








결혼하며 혼수를 마련할 때 김치냉장고를 사지 않았다. 남편은 김치를 좋아하지 않아 내가 먹을 김치만 있으면 되었고 감사하게도 양가 모두 가까웠기에 내가 먹을 김치는 양가, 특히 친정에서 먹을 만큼만 받아오면 됐으므로. 4도어 냉장고에는 양가에서 받아온 밑반찬 몇 가지 빼고는 들어갈 게 없었다. 데이트하듯 나가서 먹고 오는 경우가 많았고 배달앱도 없던 시절, 배달비 부담없이 시켜먹기도 잘 했다. 그러다 점차 메뉴를 정해 그 메뉴에 필요한 재료만 구입하여 만들어먹기 시작했다.


어라? 꽤 그럴싸한 맛이 나왔다. 결혼전엔 요리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는데 레시피를 찾아보고 맛을 떠올리며 요리를 했는데 결과물이 생각보다 괜찮고 그 과정이 재미있었다. 그래서 할 줄 아는 몇가지 메뉴를 미리 정해 그에 맞게 장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금방 첫째가 태어났고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면서 신선한 재료를 써야 했기에 내 냉장고는 항상 '쌔삥'만 있었다.






그렇게 밥을, 이유식을 해먹고 해먹였다. 그러다 가끔씩 반찬을 받으면 요리를 할 수고가 적고, 설거지도 적게 나오고 맛도 있으니 정말 편하고 고맙고 반가우면서도 묘하게 난감했다. 장을 볼 때 무엇을 먹을지 생각해서 필요한 재료를 소량씩 사서 그때그때 해먹는데 반찬을 받게 되면 그게 다 틀어지기 때문이었다. 재료의 신선도가 떨어지고 꼬였다. 바쁜 아침에 첫째가 잘 먹는 반찬은 구원이 되기도 했지만 다음날과 다다음날에 먹어도 다 소화하지 못할만큼 많은 반찬은 내가 가진 내 부엌과 냉장고의 주도권을 뺏은 것 같아 심하게는 불쾌한 기분마저도 들었다.



한동안 마음을 비우고 받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았지만 휴직을 하여 삼시세끼를 먹어야 하고 둘째가 이유식을 먹게 된 지금은 다시 내 냉장고는 내 손안에 있어야 속이 편한 상태가 되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이렇게 하니 장을 볼 때 사용하는 시간과 돈을 아낄 수 있게 됐다. 내려놓기만 해도 울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8개월된 아기를 데리고 요리를 해도 부담스럽지 않다. 아기가 토끼잠 자는 30분이면 카레, 어묵볶음, 소세지볶음이 한 번에 가능하다(설거지까지는 불가능하다, 1시간 자주면 애호박나물, 가지나물, 콩나물 추가하고 설거지까지 가능!). 재료를 파악하고 있으니 메뉴가 뻔하여 고민할 시간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냉장고가 파먹혀 있으면 냉장고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고 없어서 사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장바구니에 어떤 물건을 담아야 하는가 고민할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또 중복 소비를 막고 가계부담을 줄일 수 있다. 8개월 아기를 돌보는 애엄마에게 시간은 금이요, 외벌이 아내에게 돈은 진짜 금이다. 장본 것을 정리할 때도 진짜 쉽다. 무엇을 샀고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빈 자리(원래의 자리)에 넣어만 주면 된다. 한번에 장을 많이 볼 필요도 없고 빈 자리가 곧 얘의 자리이니 장을 본 순간 정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재료를 소량씩 사서 끝까지 먹으니 신선하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게다가! 이렇게 맨날 만들어 먹느라 냉장고가 비어 있으니 야식을 안 먹을 수 있다. 아니, 못 먹을 수 있다.







냉장고 하나만 적당히 비우고 적당히 채웠더니 부엌일이 쉬워졌다. 요리를 할 때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걸 집으로 확장하면 난 집안일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물건을 중복해서 살 게 없어지고 어딘가 있었는데 하고 찾느라 헤매지 않게 되고, 물건들이 제 자리를 찾으면서 내 마음도 둥둥 떠다니거나 흩어지지 않고 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매번 내가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인정해주고 칭찬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넘치고 흘러 아이들과 남편에게 좀 더 따뜻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생각으로 어느 공간을 냉장고처럼 파먹어볼까 하고 기웃기웃거린다. 몸도 마음도 조금 더 편해질 어느 날을 기다리며.






이전 06화 전기밥솥을 버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