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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Nov 09. 2023

전기밥솥을 버렸다

고 하고 싶다

햇반 먹고 싶다


큰 아이가 말한다. 아이가 말하는 햇반은 흰쌀밥이다. 가족, 특히 아이의 체중조절을 위해 흰쌀밥은 하지 않는다. 귀리, 보리, 현미를 넣은 잡곡밥을 한다. 전기밥솥에 한가득 밥을 해서 밥 전용 유리용기에 소분을 하여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다. 실리콘 뚜껑에 스팀홀도 있어 살짝 열어두고 전자레인지에 데우면 나름 촉촉하고 맛있다. 그런데 아이는 잡곡 특유의 까슬거림을 느끼는지, 보릿고개도 아닌데 흰쌀밥이 먹고 싶단다. 외식도 거의 안 하는 우리 집에선 좀처럼 먹기 힘든 흰쌀밥. 가끔 밥 하는 것을 잊으면 이럴 때를 대비해 사둔 햇반을 데운다. 아이는 햇반을 보면, 아싸 하며 환장하고 먹는다.



그런 아이가 우리 엄마집에 가면 흰쌀은 섞지 않고 현미로만 한 밥을 군소리 없이 잘 먹는다. 할미 밥상 버프를 받은 건지 아이는 이상하게 그 밥은 잘 먹는다. 찰현미냐 물었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그럼 뭐가 다른가 살펴보니 밥솥이 다르다. 엄마는 가스레인지에 압력솥을 올려 밥을 짓고 나는 전기밥솥에 코드를 꽂아 밥을 짓는다. 아, 압력밥솥을 사야 하나.



뭘 하나 사려해도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사지 않는 일이 다반사인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접어둔다. 가스불 앞 압력솥의 추가 흔들리고 몇 분이 지나면 중불로 줄여라, 또 몇 분이 지나면 약불로 줄여라. 그리고 뜸을 몇 분 들여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던 엄마의 모습이, 그 명령어를 새기기 위해 잔뜩 긴장했으나 자꾸만 시간을 헷갈렸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게다가 엄마는 가스레인지를 쓰고 나는 인덕션을 쓴다. 엄마에게 물을 수가 없다. 물론 유튜브가 알려주겠지만 일단은 패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는데 이번엔 내솥공격이다. 올스텐 내솥이 아니면 코팅이 벗겨져서 발암물질이 나오기 때문에 내솥을 몇 년 주기로 갈아주어야 한다는 내용의 피드가 인스타그램에 자꾸 나온다. 그러니 자신이 공구하는 올스텐 내솥을 쓰는 전기밥솥을 사라는 거겠지만 자꾸 맴돈다. 모르면 몰라도 알고 난 이상 아기들에게 코팅 내솥에 지은 밥을 주고 싶진 않다. 코팅이 싫어 코팅팬을 다 버리고 스텐팬 사용법을 익혀 이제는 자유자재로 계란 프라이도 두부부침도 해줄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내솥을 주기적으로 바꾸자니 돈이다(맨날 돈돈 거린다. 글마다 구질구질. 그런데 이러고 산다). 스텐 내솥을 쓰는 전기밥솥을 사자니 으아, 생각보다 비싸다. 게다가 우리 집 전기밥솥은 아직 밥은 잘 짓는다. 그러면 새 걸 사는 건 허용이 안 된다. 필통도 쓰레기통도 20년을 쓰는 (저번에 버려진 걔가 아니라 안방 화장실에 버젓이 살아 숨 쉬는, 팬시점에서 3500원이었던 쓰레기통이다. 앞으로도 쓸 거다.), 우산이 구멍 날 때까지 써서 비가 새도 새 우산을 사지 못해 해외여행 가서 쓰다 강제로 버리고 온 뒤에야 새 우산을 사는 나에게 제 기능을 하는데 새 물건을 사는 건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계속 쓸 수도 없다. 아니 이미 쓰기 싫다. 건강을 위협한다니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냥 안녕이다. 전기밥솥에게 안녕을 시원하게 고하려고 하니 뭔가가 해소되는 것 같은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그래, 하루에 하나씩 커다란 거, 작은 거 비우는 거야. 내가 공간과 물건의 주인이 되는 거야! 아무래도 압력밥솥을 사서 엄마밥처럼 찰진 잡곡밥을 먹어야겠다 싶어서 남편에게 통보한다. 나 전기밥솥 버리고 압력밥솥 살 거야. 그래, 압력밥솥 밥 맛있겠다. 당신 알아서 해. '인덕션 압력밥솥' 찾아보니 풍년에서 시작해서 휘슬러로 가야 하고 스텐 종류는 304나 316으로 사야 한단다. 통 5중이 두껍고 좋은데 좀 무겁고 솥이 작게 느껴질 수 있으며 비싸서 통 3중도 괜찮단다. 머리가 아프다. 새 정보를 넣을 공간도 없고 쇼핑은 쥐약이라 알레르기반응이 올라오는 듯하다.






안 되겠다. 꼭 뭘 사야 하는 걸까. 안 사고 있는 걸 쓰는 방법은 없을까 하던 중 냄비밥을 해보자 싶다. 태어나 냄비밥을 해본 적은 당연히 없을뿐더러 먹어본 적도 별로 없다. 어릴 적 부모님과 야외에서 코펠에 몇 번, 결혼 후 남편이 딱 한 번, 아, 남편이 냄비밥을 해준 이유가 시어머니께서 해주셨기 때문이라 어머님 냄비밥도 몇 번. 그러나 그 누구도 인덕션에 해준 사람은 없었으므로 유튜브에 인덕션 냄비밥을 검색한다. 영상이 별로 없다. 영상을 보는 참을성이 없어 유튜브를 잘 보지 못하는 편이지만 꾹 참고 몇 개를 둘러본다. 냄비밥이 잘 되면 인덕션용 압력밥솥 사지 않고 있는 냄비로 밥을 짓는 거다. 전기밥솥도 버리고 새로운 것도 사지 않고 말이다.


게 중에 5, 15, 5를 기억하라는 썸네일을 가진 영상이 마음에 쏙 든다. 30분 불린 쌀과 물을 1:1로 냄비에 넣고 센 불에 5분, 약불에 15분, 불 끄고 5분을 뜸 들이면 맛있는 밥이 된단다. 당장 쌀을 씻어 불린다. 쌀이 부는 동안 빨래를 개킨다. 아기랑 놀며 빨래를 개다 보니 30분은 금방이다. 불을 올린다. 나는 금방 까먹고 밥을 태울 가능성이 높은 인간이므로 타이머를 꼭 맞춘다. 냄비 뚜껑의 스팀홀로 밥물이 푸시식 취취 거리며 튀어 오른다. 물이 많은가? 밥을 너무 많이 하는 건가? 살피며 뚜껑도 열지 않고 불도 줄이지 않고 5분을 기다린다. 삐비비비 타이머가 울리면 약불로 바꾸고 15분간 아기에게 장난을 건다. 다시 타이머가 삐비비비 울리면 잊을세라 5분 타이머를 다시 맞춘다. 마지막으로 타이머가 울리고 나면 냄비 뚜껑을 연다.


하얗고 뽀얗고 예쁜 밥알들이 선물처럼 한가득 담겨 방긋 웃는듯하다. '한 입 먹어보니 달고 맛있는 밥이다. 나 냄비밥 잘하네. 다음엔 잡곡으로 해봐야지. 한 김 나가게 둔 뒤 늘 그랬듯 유리용기에 밥을 덜어 넣는다. 살짝 누룬 밥이 냄비 아래 꼿꼿하게 자리하고 있다. 끓인 물을 넣어 누룽지를 만든다. 누룽지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 나 누룽지 좋아하네.


학원에서 돌아온 큰 아이에게 저녁으로 흰쌀밥에 반찬 몇 가지를 내어주니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아이가 엄마, 엄마 흰쌀밥 할 줄 알아? 햇반보다 맛있다. 하며 리필을 외친다. 한 그릇 더 먹어도 돼? 그래, 밥 맛있지? 냄비로 한 밥이야. (엄마 잘했지?)






전기밥솥 넌 진짜 안녕이다. 마침 오늘 분리수거 날이다 이 말이다. 그런데 막상 버리려니 멀쩡히 작동하는 걸 버리는 것이 괜시리 아깝게 느껴진다. 당근에서 전기밥솥을 검색한다. 사람들이 2만 원 정도에 쓰던 걸 판다. 나도 팔아볼까. 안 팔리면 짐인데. 팔기엔 좀 미안하기도 하고. 괜히 엄마에게 전화해 본다. 엄마는 식혜를 만들어 먹거나 고구마를 삶거나 구운 계란을 만들 때 쓰는 건 어떠냐고 한다. 부엌장을 정리해서 공간이 마침 남았는데 그 안에 넣어두었다 쓸까. 고민하는 나에게 인덕션용 솥을 선물 받아서 주겠다고 하는 엄마에게 거절의 말을 한다. 일단 냄비로 밥 지어먹어볼게요.



정말 전기밥솥 없어도 될까. 다시 사려면 꽤 비싸던데(또 돈 얘기. 흠흠). 마음이 흔들리는 와중에 이틀이 지났다. 일단 자리는 밥솥장에서 현관 앞으로 옮겼다. 두 발자국만 더 나가면 이제 안녕이다. 조만간 전기밥솥을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밥솥이 있었는데 없어졌습니다



*매거진 맥시멀리스트의 1일 1비움에 담겨있던 글들을 담아 10월 23일부터 월요일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axwanttobem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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