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쓰기 역사
with 함글 23. 4. 28
나는 언제부터 글을 썼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분명히 초등학교 1, 2학년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집에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기장이 있는데, 내 아이가 외갓집에 갔을 때 고스란히 보존된 내 방에서 약 30년 가까이 된 내 일기장을 용케 찾아낸 것이다. 지금 보면 말이 앞뒤도 잘 안 맞고, 급발진도 많고, 어린애 같은 면이 다분히 보인다. 진짜 웃기다. 내 일기를 보면서 내 아이도 킬킬 웃는다. 자기는 이것보다 잘 쓸 수 있다고 하길래 응원해 주었다.
자유롭게 상상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초등 6학년 때인 것 같다. 그때 분명 두 친구와 각각 판타지 세계의 등장인물이 되어 이야기를 같이 만들었다. 나는 인간 전사였고 다른 친구는 각각 엘프와 마왕의 자식(마왕의 자식이라는 것이 출생의 비밀)이었다. 우린 그때 한창 '프린세스 메이커'나 '로도스도 전기'같은 게임과 만화에 빠져서, 세 명의 친구가 마왕을 물리치러 가는 모험 이야기를 구상하며 즐겁게 앞부분을 써 내려갔다. 그러나 그 소설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두 친구는 각각 엘프와 마왕의 자식이라는 자신의 캐릭터에 충실했던 건지, 점점 성격이 서로 대척점으로 밀려나서 멀어지고 말았다. 마왕의 자식이 내게 들러붙었고 엘프는 빛의 세계로 떠난 듯싶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마왕의 자식과 25년이 넘는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엘프 친구는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그래서 이야기는 결국 머릿속에만 아련한 추억처럼 남아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소설은 고사되고, 중학교 때는 완전히 다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두 소녀가 주인공인 동양판타지. 당시 12권짜리 드래곤라자와, 3권짜리 반지의 제왕이 있던 시절이었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것 같다. 기왕이면 동양 판타지로! 검과 마법을 차용하여 도(刀)와 부적술이 난무하는 출생의 비밀이 있는 소설이 좋겠다며 두꺼운 노트를 손글씨로 채워갔다. 무협을 읽어 본 적이 없던 내게 그때 가장 어려웠던 건 동양의 세계관과 스토리를 연결해 가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사실 지금도 너무나 어렵다. 개연성 있게,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십 대 중반의 내게 큰 과제였고 결국 소설은 중반 즈음 내가 고등학교에 가면서 멈추게 된다.
고등학생이 된 나에게는 이제 입시라는 큰 장벽을 어떻게든 넘어야 했고, 논술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동안 써 온 소설과는 달리 주제를 가지고 주장과 근거를 갖고 논리적인 글을 써야 했다. 글은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그동안 소설을 쓴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그럭저럭 쓸 수 있었다. 그리고 소극적인 성격은 면접보다는 논술이 차라리 나았다. 말보다는 글. 말은 글보다 좀 더 즉시성을 가지면서 빠르고, 무엇보다 내뱉은 순간 수정할 수가 없다. 논술을 쓸 때 좋았던 점은 주어진 주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고 내 생각대로 뼈대를 만들어 거기에 맞춰 채워나가면서 수정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대학을 논술로 갔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는 친구들과 놀고먹고 마시느라 글은 뒷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리포트와 과제와 관련된 글만 쓰게 되었다. 그 후 이어진 구직활동과 직장생활. 그리고 결혼 후 출산과 양육에 이르기까지 숨 가쁜 삶의 장면장면들을 소화해 내면서 내가 쓸 수 있었던 것은 일기. 생각해 보니 매 해 일기장을 사서 반절 정도씩은 썼던 것 같다. 부끄러운 일기들을 지금 다시 들춰보면, 대부분 젊은 시절의 방황, 우울과 관련되어 있다. 이 방황과 우울은 결혼하면서 조금 희망을 발견하는 것 같더니 출산과 동시에 와르르 무너졌다. 아이를 돌보면서 발견하는 나와 남편의 밑바닥과 아이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일기에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정말 몇 년간은 끔찍했다. 30대 초중반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왕따를 당했어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다. 결혼하기 전에 그 밑바닥을 봤어야 하는데. 아무튼 이 시기의 내 일기장은 온통 슬픔과 절망의 바다다.
그 어려웠던 시기를 약과 부부상담으로 넘기고 게임을 통해 현실도피를 하면서 조금 안정감을 찾은 후, 나는 어느 글 모임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힘든 시기에 썼던 일기들을 정리하여 중단편으로 글을 써봤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시 마주하는 건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것 같았지만, 약 2만 8천 자의 글을 써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해소가 되는 것 같았다. 그 시기의 몰랐던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게 되었고, 남편의 마음도 조금 헤아릴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좀 남편이 덜 밉다. 때로는 좀 안 됐다.
그 후로도 글모임을 통해 소설도 조금 써보고, 에세이랑 시도 써보는 등 조금씩 글을 써보고 있다. 글을 자주 쓰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일들로 쓰지 못할 때가 있어 아쉽다. 하지만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일기든 무엇이든 천천히, 계속 끄적이며 살 것 같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의 글쓰기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