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열여섯 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캐나다 동부 끝 핼리팩스였다. 20년 전 나는 언젠가 한 번은 외국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설레는 꿈을 안고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호기심으로 가득한 나의 20대로 기억되고 있다.
눈을 지긋히 감으니 빠른 영상으로 캐나다에서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떠오른 기억은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이었던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이다.
빨강 머리 앤은 어릴 적 나와 동일 시 할 정도로 애착이 가는 만화 주인공이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궁금한 것도 많고 질문도 많은 아이, 항상 엉뚱한 상상을 하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믿기지 않겠지만 어릴 적 나는 진짜 주근깨에 빼빼 말랐었다.
나의 동심 속 주인공이 살았던 곳을 가보았다는 것은 여행 이상의 의미였다. 앤은 만들어진 소설 속 캐릭터이다. 하지만 그곳을 배경으로 작가 몽고메리가 앤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마치 내가 그 속에 들어가 있다는 상상이 되었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은 만화에서 본 것처럼 넓게 펼쳐진 들판과 나무들이 어울려져 있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앤이 처음 매튜아저씨를 만나서 마차를 타고 갔던 벚꽃 터널길이 그려졌다. 꽃눈이 휘날리는 그곳에서 새 가족이 생긴다는 희망에 찬 앤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려졌다. 친구 다이애나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키웠던 그 나무 숲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파란 바다를 보며 행복한 꿈을 꾸었던 앤도 보였다.
앤이 좌절과 절망에 울기도 했지만 희망을 꿈꿨던 장소, 초록지붕집도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그곳은 몽고메리가 살면서 소설을 썼던 곳이라고 한다. 만화 속 앤이 금방이라도 계단으로 뛰어서 내려올 것 같이 보존되어 있었다. 짙은 갈색의 나무침대에서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울면서 기도하는 앤 셜리의 모습이 느껴졌다. 무뚝뚝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마릴라 아주머니의 모습도 그려졌다. 금방이라도 초록지붕 집 이층 창문을 열고 앤이 나를 부를 것 같았다.
섬 전체가 앤이었다. 섬에 있는 나도 앤이 되었다...
빨강 머리 앤이 어린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길래 아직까지도 기억 속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앤 셜리..
외로운 존재로 태어나 만만치 않은 세상을 헤쳐나가는 앤의 당찬 모습이 어린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 같다. 때론 사람과 처한 상황에 실망도 하고 좌절하지만 그때마다 셀프모티베션을 작동해서 일어나곤 했다. 앤은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여유치 않은 세상도 괜찮은 곳으로 그리곤 했다. 삶에 대한 의지도 앤이 그 삶을 사랑하는 만큼 강했다.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앤의 모습에 귀감이 되었던 것 같다. 빨강 머리 앤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앤의 모습을 사랑하고 환호했던 나는 현재 그렇게 충분히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캐나다까지 갔었던 열정 충만했던 나의 20대 모습과 지금은 무엇이 다른 지도 돌아보고 싶다.
오늘따라 책장에 꽂혀있는 '빨강 머리 앤' 책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때로 돌아가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있는 '빨강 머리 앤'이 되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