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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랬구나 Dec 06. 2023

우유를 데우다 외할머니를 생각하다

냄새로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그 냄새를 다시 맡으면 '훅'하고 기억이 살아난다.

나는 특히 후각에 예민해서 더더욱 그런 편이다.



데워진 우유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면 우유를 데워 주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일이 바쁜 엄마를 대신해서 외할머니가 돌봐주셨다.

지금도 라떼를 좋아하는 나는 아기였을 때도 우유를 참 좋아했었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는 우유를 주실 때마다 꼭 데워서 주셨다.


얼마 전 따듯한 우유가 먹고 싶어서 전자레인지에 땡 하고 데워서 우유를 마시려는데

'훅' 풍겨오는 데워진 우유냄새를 맡으니 외갓집의 풍경과 우유를 주시는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그때는 전자레인지도 없던 시절인데 할머니는 매일 어떻게 데워주셨나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 데워주셨든 지금 내가 마시는 렌지땡 우유보다는 훨씬 수고와 정성이 많이 들었음은 분명하다.

역시 할머니의 사랑은 대단하다.



외할머니를 떠올리는 또 한 가지의 냄새가 있다.

바로 갓 지은 밥 냄새.

밥 짓기가 완료된 전기압력밥솥 뚜껑을 열면 수증기와 함께 구수한 밥 냄새가 올라온다.

수증기와 함께 할머니의 모습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할머니는 갓 지어진 밥이 들어있는 밥솥 뚜껑을 열고 밥을 주걱으로 섞으시면서 중얼중얼하셨다.

"할머니 뭐라고 하는 거야?' 여쭤보면

"부처님께 곡식을 주셔서 감사하고, 우리 식구들 이 밥 먹고 모두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하셨다.

한 번도 안 빼놓고 밥을 지으실 때마다 할머니는 기도를 하셨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밥을 해도 밥솥 뚜껑은 꼭 할머니가 열러 오셨다. 내 자식들을 지키고픈 할머니의 강한 의지였을까.


할머니처럼 절에 다니진 않지만 나도 가끔 아이들이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밥솥을 열고 밥을 섞으며 중얼중얼 기도를 한다. 이 밥 먹고 아이들 안 아프게 해 주세요. 혹은 이 밥 먹고 다 잘 되게 해 주세요.



할머니의 문갑 서랍에는 작은 사진첩이 있었는데, 할머니의 여섯 남매의 아이들 사진만 모은 사진첩이었다.

할머니의 외손자, 친손자 모두 열두 명의 아이들이 할머니 사진첩 속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사진첩을 매일 보고 또 보셨다. 그 손자들이 커서 결혼을 하고 아기가 태어나면 할머니는 꼭 사진을 달라고 하셔서 그 사진첩에 넣어두셨다.


이젠 먹을 수 없지만, 직접 삶으시고 손으로 뜯어서 입에 넣어주시던 할머니의 닭백숙맛이 그립다.

그래서 손맛을 자랑하는 식당 이름 중에 외할머니댁이 많은 걸까.


어느 날 갑자기 난 아들만 둘이어서 절대로 '외할머니'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던 날, 나는 진심으로 슬펐다.

그 좋은 외할머니가 될 수 없다니!


이름도 예쁜 우리 신금성 할머니.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계세요.



이미지출처_영화 코코 (이 장면이 나는 참 좋다. 영화속에선 증조모와 증손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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