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어려운 것 투성이다. 감정도, 경쟁도, 인내도, 사랑도, 이별도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MZ들 사이에서 불교가 유행이라던데 '사는 게 고통'이라는 말에 유달리 공감하는 요즘, 나도 멘탈 관리를 위해 불교의 매력에 빠져야 할 것만 같다. 잘하고 싶은 것 투성이인데 어째 걷는 길마다 진흙 투성이일까. 중학교 시절 찾아온 사춘기는 도대체 언제 끝나려는지, 울음처럼 아이가 삐져나오고 아이처럼 울음이 뛰어다니고 한다. 정작 울고 싶을 땐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시스템인지. 예민한 사람의 삶이란 도통 알 수 없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실타래로 앞길이 버무려지고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회오리가 치고 있다. 내 뇌는 이렇게 빈틈없이 빽빽한데, 누군가 내게 건네는 따스한 위로나 조언따위가 들어올 자리가 있을까?
얼마 전에 누가 내게 묻더라.
ㅡ 죽을 만큼 사랑할 수 있어?
ㅡ 응.
ㅡ 근데 그거 알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게 더 어려운 거래.
ㅡ 그렇네.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죽음은 어찌 됐든 나의 선택으로 행하는 결과지만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건 오롯이 그만을 위해 행해야 하는 것이지 않나. '너 때문에 산다'가 칭찬이고 '너 때문에 못 살아'가 꾸중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너 때문에 산다는 말이 구속적인 말로 느껴졌다. '내가 못하면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겠구나'와 '너 때문에 억지로라도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깃들 수도 있기 때문에. 죽음과 삶은 한 끗 차이라는 게 정말 맞다. 같은 문장에서 삶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니. 칼로 잰 듯 뚜렷하면서도 시야각에 따라 달라지는 조형물 같다, 생이라는 것.
나도 사실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 죽고 싶을 때마다 그 존재를 떠올리며 밤을 가라앉히곤 하는데 나는 의외로 고차원의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때 나는 내가 꽤 마음에 든다. 구속적이라고 생각해놓고는 나도 참 변덕쟁이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니 너무 멋있지 않나. 원래 예민한 사람은 사소한 것에서 큰 의미를 찾는 걸 잘한다. 난 마음도, 그릇도 작지만 그래서 사랑도, 행복도 크게 느낄 수 있겠지. 여름이 지고 가을이 피면 내게도 나름의 행복이 찾아올 것이다. 내 마음은 작아서 뭘로든 쉽게 가득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