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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Jul 09. 2024

라면 연대기 36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6     


문을 박차듯 들어선 영애는 잔뜩 화가 치솟은 표정으로 카운터로 다가섰지만,

그냥 봐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두루 치렀을 것으로 보이는 마담은 왜? 하는듯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영애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들고 갔던 마호병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 언니! 대체 이 동네 새끼들은 왜 이 모양이야?  일단, 이모! 저기 갈매기 아자씨한테 쌍화차 진~하게 한 잔~


다짜고짜 성질을 올리는 영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 군은 속으로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랬었다.

뭐든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일단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영애가 기억났다.

어쩌면 그녀는, 원해서 정해진 게 아닌 장녀라는 이유만으로 한 살 터울의 동생에게 모든 걸 양보하며 사는 삶에서 터득한 그녀만의 생존법일지도 몰랐다.

정작 영애의 고함을 들은 마담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 왜, 이 동네 애새끼들은 뭐 특별하던? 물건이 너무 작나?


천박한 말을 천박한 뉘앙스 없이 심드렁하게 읊조린 마담은 자기가 말을 해놓곤 스스로도 웃긴 듯 키들거렸다.


- 아니, 자기네들 고스톱판에 달랑 커피 서너 잔 주문해 놓고는 가슴을 막 주무르려고 하잖아! 내가 만만해 보여?    

 

영애의 항변이 비좁은 다방을 쩌렁쩌렁 울리자 구석에 몰려 앉아있던 병사들 서너 명이 킥킥거렸다.

마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지그시 영애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쉰다.     


- 야, 영자야. 너 참 어처구니가 없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해? 대한민국에서도 저기 남쪽 섬에 팔려 가기 전 마지막 단계라는 최전방이야. 대체 뭘 기대해? 너도 여기저기 서울서 팔려 다니다 빚에 쫓겨 여기로 들어온 거잖아. 그러니 뭐다? 돈이 최고지! 허락 없이 가슴을 만지려고 하면 그냥, 그러려면 티켓을 끊으라고 하면 되잖아. 돈이 없으면 더 못 만질 거고. 돈이 있으면 티켓 끊어서 너도 벌고 나도 벌고. 좋잖아?     


거침없이 술술 대답하는 마담의 말에 영애도 잠시 말문이 막혀 보였다.

아주 짧지만, 그 몇 마디 대화로 라 군은 왜 영애가 이 최전방 병촌으로 흘러들었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래도 중학생 시절 라 군의 눈에는 꽤 여유로워 보이던 영애네 집이 어찌 되었기에 저 아이가 하필 다방 레지의 길로 들어섰는지 그걸 모를 뿐.

어찌 보면 첫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첫 입맞춤의 상대라는 기억에 어딘가 아련할 수 있겠지만,

라 군의 기억 속에서 영애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들에 대한 기억들은 대개,

당시의 혹독하고 남루하던 시절들이 흑백사진처럼 겹쳐져서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다.     

마담의 조용한 대꾸에 할 말이 없어진 듯 영애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라 군이 앉아있는 자리로 걸어오더니 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라 군의 곁에 앉았다.

어중간한 위치에 앉아있던 라 군은 헉, 하며 옆으로 밀려 나갔고.

자리에 앉은 영애가 카운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 언니~ 여기 쌍화차 하나 추가!     


마담은 눈을 흘기더니 카운터 뒤 주방에 대고 쌍화차 하나 추가! 라며 맞서 소리를 지른다.

라 군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라 군의 표정을 힐긋 바라본 영애는 테이블 위에 놓인 라 군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그 곁에 놓인 라이터로 불을 붙여 '후'하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 야, 오랜만인데 쌍화차 한 잔 살 수 있잖아? 넌 군인이 되니 꽤 키도 커지고 몸도 좋아진 거 같다?    

 

마치 엊그제 헤어진 친구처럼 영애는 라 군의 한쪽 팔에 팔짱을 자연스럽게 꼈다.

영애의 가슴이 뭉클하며 라 군의 팔뚝을 누르는 감각에 라 군은 십 대의 그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 영…. 자라고?     


라 군의 입에서는 엉뚱하게 아까 마담이 영애를 부른 이름에 대한 의문이 튀어나왔다.

다시 '후'하고 허공에 도넛 같은 연기를 뿜은 영애가 코웃음을 친다.

    

- 야, 너 다방레지가 본명 쓰는 거 봤어? 닌 그나마 ‘영’은 그대로니까 나은 거라고. 너 다방레지애들 중에 미혜니 소영이니 하는 애들 원래 이름은 다 분자 복순 이래. 웃기지 않냐?    

 

혼자 킥킥대는 영애를 보며 또다시 라 군의 입에서는 머릿속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 근데,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라 군의 질문에 영애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미간을 진하게 찌푸리며 세게 담배를 빨아들이곤 재떨이에 담배를 거칠게 비벼 껐다.     


- 어쩌다가 라니? 내가 뭐 어때서?     


사나운 표정으로 라 군을 흘겨보는 영애는 이미 잔뜩 껴안고 있던 팔짱을 내던지듯 놓고 있었다.     


- 아니, 뭐……. 어쩌다 이런 전방에 다방 레지로 오게 되었냐는 거지…….


- 너 아까 못 들었어? 총을 너무 쏴서 귀먹었냐? 서울서 빚져서 팔려 왔다잖아. 못 들었냐?   

  

날카로운 영애의 대답에 라 군의 얼굴이 굳었다.

순간적으로 라 군은 그녀가 혹시 ‘팔리다 또는 팔린다’라는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곤 있는 건가 싶어서 정말로 어리둥절해졌다.


그런 말은 저 멀리 영국, 미국의 식민지 시대의 흑인 노예 또는 고대 아라비아 쪽 혹은 로마제국 시대의 적 포로를 노예로 삼던 시절.

아니면 조선시대의 노비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지 지금의 시대에 맞는 용어는 아니지 않나?  


        

노예선 설계도

* 국립국어원 사전에 따르면 마호병은 보온병으로, 레지는 다방종업원으로 순화하는 게 맞으나 그랬을 때 어감이 느껴지지 않아 과거 용어를 그대로 씁니다.     

레지(reji)「명사」 다방 따위에서 손님을 접대하며 차를 나르는 여자.

마호-병(mahô [魔法]甁)「명사」 물 따위를 넣어서 보온이나 보랭이 가능하게 만든 병.≒보온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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