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능선오름 Jul 16. 2024

라면 연대기 38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면 연대기 38     

L 씨의 라면 역사에 대한 보고서

라 군은 적금통장을 들여다보았다.

하사관학교 입교 후부터 꼬박 납입했던 적금통장과 급여가 매달 들어오는 통장. 그가 가진 ‘동산’의 전부였다.

그리고 대출 신청서.

라 군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돈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사회에서 ‘여신’이라는 단어로 불리는 것을 총동원해서.     


- 직업군인 신분인데 어떻게 좀 안 되나요?     


라 군의 질문에 창구 맞은편에 앉은 대출계 은행원은 빤히 라 군을 쳐다보았다.


- 아니 뭐 말이 군공무원 이긴 한데.. 그리 복무가 오래되지도 않았고.... 게다가 전투병과 시잖아요?

- 왜요? 전투병과가 어때서요?     


의아해하는 라 군의 말에 행원은 라 군의 군복차림을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훑더니 냉소를 띄웠다.


- 보시다시피, DMZ 근무 시잖아요, 솔직히 은행입장에서야 언제 죽을지 모를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고 싶은 생각이 안 나겠죠? 그나저나 이 최전방에서 큰돈 쓰실일은 없는 거 같은데.... 혹시 도박하십니까?

- 도박이라뇨? 저는 화투 순서도 모르는데요.     


아무리 눈치 없는 라 군이지만 자신은 이 은행에서 그다지 반길만한 손님은 못된다는 것을 느끼며 조금 다급해졌다.     


- 정 그러시면, 이자 석 달만 연체되면 부대로 월급압류 들어갑니다. 그러면 나중에 진급 때도 좀 어려울 건데 괜찮으세요?

- 네. 그렇게 할게요.

- 허, 참. 이거 뭐 나라를 지키시는 분께 죄송은 한데, 은행도 흙 파먹고 사는 장사가 아니라서 말이죠. 그리고, 이 대출 심사하는 조건으로 좋은 보험이 있는데 이거 하나 가입하시죠? 물론 강. 제. 는 아닙니다만.     


잠시 움찔했던 라 군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 군의 앞에 놓인 라면의 면발이 팅팅 불어서 거의 우동처럼 변할 때 즈음에야 라 군은 후루룩 한 젓가락 면발을 빨아들였다.

다 불고 식은 라면의 맛은 별로였다.

그토록 좋아하는 라면인데도 식고 불어버린 면발은 그저 미끄덩하고 짭짤한 밀가루 뭉치에 불과했다.

아마도 한동안,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라 군은 자취방에서의 끼니를 거의 라면으로 때워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이미 하사관학교에서부터 소문난 짠돌이였던 라 군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자신을 위한 보상으로 짜장면도 먹고 가끔은 탕수육을 곁들이기도 하는 사치? 를 부리곤 했었는데.

이젠 싫어도 가능한 부대에서 병사들이 먹는 ‘짬밥’을 얻어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거나로 버텨야 할 것이었다.     

- 아니. 그렇게나 많이 빚을 졌다고?

- 야, 그게 여기 구조가 그래. 뭘 먹든 뭘 사든 그게 월급이 아니고 다 빚으로 깔리는 구조라고, 그러니 매달 빚이 늘어나는 거지.

- 아니, 어떻게 그래? 무슨 방법이 없어?     


라 군이 다방 밖 중국집에서 영애와 함께 저녁을 먹게 된 건 흔히 보이는 데이트라거나 다방 아가씨들이 끊는 티켓 같은 게 아니었다.

영애가 다방에 들른 라 군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고, 라 군은 그러자고 했을 뿐.

오랜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영애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라 군에게는 조금 싱숭생숭한 일이었다.

그리고 얼추 짜장면과 탕수육 그릇이 비워가고, 

반주로 시킨 싸구려 배갈 병이 반쯤 비워지자 영애가 불쑥 자신의 빚을 이실직고한 것이다.     


- 야, 사실은 나 지금도 영업시간이잖아. 이렇게 시간을 빼면 그게 다 티켓 비로 계산이 되고 그 돈도 다 빚으로 남는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영애의 말에 라 군은 뱃속을 넘어간 탕수육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영애는 조선 시대 노비처럼 그 다방에 목매어 있는 상태가 아닌가.     


- 너, 그러면 빚을 갚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침을 꿀꺽 삼킨 라 군이 물었다.

라 군의 말에 영애는 두 손으로 뺨을 괴곤 잠시 생각이라도 하듯 눈동자를 굴렸다.

라 군은 이 상황에서 그런 영애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을 느끼며 한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 뭐, 그러면 빚 대신에 돈을 모을 수 있겠지. 지금처럼 매달려서 일하면 아마 한 이년 정도면 조그만 가게 하나 차릴 정도는 될걸?     


영애가 가게에 지고 있다는 빚은 라 군의 상상보다는 꽤 큰 금액이었다.

박봉인 초급 하사관 월급으로는 대체 어떻게 어떤 식으로 해야 그렇게 많은 빚이 쌓이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라고 라 군은 생각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 자신이 조금 힘들어서 영애가 사는 게 좀 나아진다면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런 논리적 이유는 나중에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고,

라 군은 영애의 빚에 매인 상황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마음속 깊이 어딘가에서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흰 봉투. 누런 봉투. 얇은 봉투·두툼한 봉투. 깨끗한 봉투. 구겨진 봉투.

라 군이 탁자 위에 내놓은 봉투들을 보며 영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영애는 탁자 위에 놓인 각양각색의 봉투들과 탁자 너머에서 무척이나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라 군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 뭐야? 이게 다?     


라 군은 어색한 표정의 미소를 더 어색하게 일그러뜨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부담은 갖지 말고. 네가 빚에 매어서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지 말고 돈도 좀 모으고 그랬으면 좋겠다. 우린 아직 이십 대고 앞으로 살아갈 걸 생각해야 하잖아?     


라 군의 말에 영애는 말없이 조금 전과 같이 탁자 위에 놓인 각양각색의 봉투들과 라 군의 하회탈 같은 얼굴을 몇 번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달라진 것이라면 영애의 눈동자에 물기가 맺혔다는 것뿐.     


- 야. 네가 무슨 돈이 있어. 초급간부들 돈 없는 거 나도 알아.     


영애 특유의 높은 음성이 아닌 척 가라앉은 목소리.

라 군은 영애의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한 거니까. 네가 좀 편한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것뿐이야.   

  

라 군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영애가 앞으로 몸을 훅 숙이며 들어오더니 라 군의 입술에 영애의 입술이 달라붙었다.

순간 당황한 라 군은 흡하고 숨을 멈췄지만, 영애의 입술에서는 오래전 기억과 같이 담배의 맛과 달콤함이 뒤섞여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 연대기 3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