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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Aug 03. 2024

라면연대기

43

라면 연대기 43     


영애가 후루룩 쩝쩝거리며 라면을 들이켜듯 먹는 동안 라 군은 몇 젓가락을 먹다가 이내 내려놓고 말았다.

이 기이하고도 황당한 해후에서 저리도 편하게 라면을 먹을 수 있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다방에서 영애를 만나고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으니,

라 군은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다른 어떤 생각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 상태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지극한 우연으로 영애를 만난 것이 반갑기도 하고,

그러나 영애가 보인 그 아무렇지 않아 하는 태도가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저 평소의 외박처럼 조용히 나와서 사회를 바라보는 외인으로 이틀을 지내다가 다시 조용히 전방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을 시간을,

이렇게 혼란스러운 재회로 번잡해지는 상황이 싫기도 했다.


처음에 전방의 다방에서 뜻하지 않게 영애를 만났을 때 가졌던 약간의 설렘.

그리고 몇 번 다방을 오가며 느낀 측은함과 어딘가 애처로운 공통점.

이후에 벌어진 배신감과 박탈감들을 어느 정도 시간이 삭여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또 이런 우연으로 영애를 만나게 된 것이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런 우연으로 자신이 로또복권을 샀었다면 훨씬 좋았으리라는 것.     


- 너 왜 안 먹냐? 배 안 고프니?     


한참을 말없이 후루룩 거리며 라면을 삼켜가던 영애가 문득 라 군의 아직 가득 남은 라면 그릇을 보며 라 군에게 물었다.     


- 어, 그다지. 배가 안 고프네.     

- 허, 군바리가 배가 안 고프다니 우리 군바리들도 다됐네.


라 군의 성의 없는 대답에 영애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라 군 그릇에 있던 라면을 자신의 빈 그릇에 다시 붓더니 이내 후루룩 쩝쩝거리며 연신 라면을 삼켰다.

영애가 그렇게 급하게 라면을 삼키는 것을 보니 전혀 식욕을 못 느끼던 라 군도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순식간에 두 그릇의 라면을 비운 영애는 이제 좀 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밥상을 옆으로 치우고는 벽에 등을 기댔다.

배가 채워진 탓일까.

마치 사선에 올라선 조교처럼 며칠 굶은 셰퍼드처럼 눈빛이 심상치 않던 영애의 표정이 사선에서 안전사격을 마치고 PRI 교장을 내려온 조금 느긋해진 것 같았다.(PRI : Preliminary Rifle Instruction)     


- 아, 빌어먹을. 뭐 그리 바쁜 다방도 아닌데 어찌나 뺑뺑이를 돌리는지 밥 먹을 시간도 없네. 넌 왜 배가 안 고프냐? 군바리가. 너 라면 좋아했었잖아?

- 글쎄. 난 괜찮아. 네가 배불렀다면 되었지 뭘.     


라 군의 대답에 영애는 ‘체’ 소리를 내며 혀를 찬다..     


- 넌 학교 다닐 때도 좀 그랬어.

- 뭐가     


영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 능력은 안 되는데도 구세주 증후군이 좀 있어 보였거든.

- 그게 무슨 말이야? 구세주 증후군?

- 그렇잖아 너 학교 다닐 때 우리 집 상태가 어떻다고 생각했어.

- 그야…….     


차마 말을 못 하는 라 군을 손가락질하며 영애가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래도 너희가 우리 집에 세를 들어와 있으니까 우리가 너네보다 낫다고 생각했지?     


라 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영애네 집에 세 들어 살 당시만 해도 라 군은 은근 영애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그래도 영애네는 집이 있고, 자신은 그 집에 세 들어 사는 신세이니 자괴감도 없진 않았었으니까.     


- 그야 그렇지 사실이고.

- 야, 근데 잘 생각해 봐. 

돌아보면 그 동네가 다 거기서 거기였잖아.

다 못 사는 동네인데 거기서 서로 비벼가며 사는 거였잖아.

그래봤자 우리도 결코 넉넉하지 못했어.

뻔하잖아.

그런데, 뻔한 건데 너는 가끔 학교에 도시락 못 싸 오는 애들하고 밥도 나눠 먹고 어려운 애들 보면 뭐라도 해주지 못해 안달했었지.   

  

뜻밖이었다. 라 군조차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 그래? 내가 그랬나.

- 그랬어. 그래서 우리끼리는 네가 참 인정이 많다고도 하고, 또 한편으론 제 앞가림이나 하지라고 생각했었지!     

영애의 회상을 들으며 라 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고 보면 천성이었다

어려운 상황의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천성

그게 때로는 인정 어린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따져보면 주제넘은 짓일 경우가 더 많았다.      


- 그러니까, 능력이 있어서 남을 돕는 건 인정이지만 넌 네 앞가림도 어려운 처지에 남의 일을 걱정하는 오지라퍼였다는 거야.

그게 구세주 증후군 아니면 뭐냐. 네가 뭐 예수라도 되냐?

 

순간 라 군은 사격장에서 조교에게 뒤통수를 갈겨 맞은 것같이 번쩍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런 거였나.

내가 이유도 방법도 안 따지고 무작정 영애를 돕는다고 나선 게 그런 거였나     


- 너 나 좋아하냐?     


또다시 기습적인 영애의 질문에 라 군은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왜 저 아이는 늘 말의 방향이 마치 영점이 흐트러진 소총처럼 제멋대로 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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