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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능선오름 Aug 04. 2024

라면 연대기  

44

라면 연대기 44     


좌충우돌에 가까운 영애의 질문이었지만 라 군은 잠시 또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영애를 좋아하는 걸까.

오래전 어둠이 가득하던 공원에서 – 사실 공원이라기보다는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그저 공터에 불과했지만 – 영애가 고백도 아닌 고백을 했었다.

자신은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을 잘 깨달아서 이도 저도 아닌 침묵으로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영애가 라 군의 팔을 꼬집으며 대답을 재촉했지만, 거짓말에 익숙하지 못한 라 군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없었었다.

물론 영애와 몰래 전철길 옆에 동산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가끔 영애와 입맞춤을 하곤 할 때면 가슴이 설레고 아랫도리가 대책 없이 부풀어 오르긴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라 군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다니던 특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장기 하사관 지원을 않겠다고 하면,

3년간의 등록금, 피복비, 식비, 기숙사비까지 모조리 되갚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게 싫다면 사관학교를 들어가면 되었는데 그만큼 공부를 전념할 자신도 없었다.

이미 정신상태가 그럴 의지조차 꺾여버렸으니까.

한창의 나이라는 10대에 인생에서 이미 체념을 배워버린 대가였다.

단지 숨만 쉬는 아버지가 나아질 거라는 희망도 없는데 희망적인 마음으로 살기 어렵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께 더 짐이 될 수 없어서 도망치듯 군대를 택했었던 건데.

현실이 각박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사치라 여기던 시간이 있었다.     


인간은 참으로 단순한 동물이라서 현실적인 문제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되자 그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던 라 군이었다.

매월 월급에서 최소한의 생활비와 적금을 빼곤 꼬박 어머니께 돈을 부치는 것으로 그나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채무 같은 느낌을 덜어내곤 하는 시절이었다.

어찌 보면 그에게 있어 부모란, 장기 저금리로 돈을 빌려준 사람 좋은 채권자 같은 것이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영애의 빚을 탕감해 주겠다고 마음먹는 건 컵라면에 물 붓듯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도 알 수 없는 기이한 마음으로 영애에게 돈을 건넸었고, 그리곤 영애는 병촌을 조용히 사라졌다.

아니, 도망쳤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다.

이렇게 우연에 또 다른 우연이 겹쳐 영애를 만나게 되었지만 모질게 굴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때 마음의 연장 선상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자신은 정말 영애를 좋아하는 건가? 모르겠다.     


-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너를 싫어하는 거 아니야.     


라 군의 뜨뜻미지근한 대답에 영애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그거 봐. 넌 말이야. 구세주 증후군이야.

딱 좋아서 뭐든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도 아니고. 그저 내가 곤란한 상황이라니까 그런 거지.
 그러니 내가 너에게 무슨 빚졌다. 생각은 안 해도 되겠네.     


제멋대로 자신이 물은 질문에 대한 대답마저 말끔하게 정리해 버린 영애가 몸을 반쯤 일으키더니 털썩 소리를 내며 침대 매트리스 위로 몸을 던졌다.

그 여파로 낡은 침대에 깔린 이불들의 겹 사이로 숨어있던 먼지와,

오래도록 배어 있었을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훅 끼쳐왔다.

반사적으로 침대를 흘깃 바라본 라 군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영애의 짧은 치맛단이 말려 올라 뽀얀 허벅지가 훅 눈에 들어오자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 야, 너 자고 갈 거지?     


또다시 영애는 사격개시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일단 총질을 해버린 신병처럼 말을 던져온다..

라 군은 순간적으로 무슨 소리인가 싶어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애들도 아닌 남과 여가 이 비좁은 방에서 함께?라는 생각.     


- 라면. 뭐 그리 긴장해? 너도, 나도 알 거 다 알만한 나이 아니냐?

뭐 네 말대로 빚이라고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만, 그래도 내가 전방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좀 미안한 건 있으니까. 한 번 자주면 되지 않냐?  이 누나가 잘해줄게.


라 군은 영애가 던지는 말이 귓속에서 웅웅 거리는 것 같았다.

천연덕스럽게도 말을 던지곤 자신도 민망했던지 킥킥대며 위옷 속으로 손을 넣어 브래지어를 휙 화장실 앞으로 던지는 걸 보니 소름이 돋았다.

그랬나.

내가 이런 걸 바라서 그렇게 영애를 돕고 싶었던 건가.

따지고 보면 별것이 아닐 이런 것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건가.

영애랑 섹스를 하고 싶어서? 글쎄. 첫 키스를 당할 때도 그랬지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딘가 간질거리는 것 같이 묘하게 두근대던 심장의 고동이 갑자기 차분해지는 걸 라 군은 느꼈다.

‘ 네가 밥 샀으니까 내가 커피 살게’라고 말하듯 가볍게 말을 던지는 영애를 보면서 라 군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혐오감이 치밀었다.


갑자기 화장실 구석에 뭉쳐 뒹굴던 알지 못할 남자들의 양말더미와 언제 썼을지도 모를 면도기들이 떠올랐다,

라 군은 말없이 화장실 앞에 버려진 휴지 뭉치처럼 놓인 냄새나는 군용 양말에 발을 집어넣었다.

자신의 양말도 저 너저분한 화장실 안에 전리품처럼 굴러다닐 것 같아서 뭔가 스멀스멀 벌레가 등을 기어 다니는 기분.     

영애는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침대에 가로누워 라 군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았다.

라 군은 축축해져 쉽게 열리지 않는 양말에 발을 욱여넣고 비좁은 형관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군화 속으로 다시 발을 집어넣었다.


군화는 신발이라기보다는 군인에게 맞춰진 옷과 같아서,

군화를 벗고 있는 군인의 몰골을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지만 군화를 신고 끈을 조이면 어딘지 모르게 단단해진 마음이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그건 본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 너 뭐 하냐? 그냥 가려고?     


말과는 달리 침대에서 몸을 조금도 일으키지 않은 영애가 느슨하게 묻는다.     


- 어.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라 군은 벗어놓았던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아이언맨 출동 준비 완료.     


- 잘 자라. 나중에 보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최대한 쿨한 목소리로 일별을 던지고 뒤돌아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라 군의 뒤통수로 영애의 낮은 혼잣말이 들렸다.     


- 병신. 세상에 '나중'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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