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안도_04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묵묵함이다. 내 학창 시절에 아버지는 늘 묵묵히 출근하고 퇴근하며 일을 한다는 표현보다는 일을 견뎌내며 멈추지 않는 쪽이었다. 승승장구하며 승진을 거듭하는 쪽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루하루 실업과 이직을 고민하는 쪽도 아닌, 그 중간에 보통의 어른이었고 보통의 사람이었다. IMF로 회사가 부도나고 광주로 이직과 전근을 하면서도 아버지는 특별히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고, 그저 결근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내게는 묵묵함이 어른의 척도이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행동이 되었다. 잘하는 것보다는, 우승하는 것보다는, 하루하루 내가 맡은 일을 묵묵히 견뎌내며 이어가는 행동 자체가 가장 의미 있는 행동으로 여겨졌다.
아버지가 퇴직과 연금을 생각하실 때 즈음해서 보통의 아들은 사회에 나섰다. 그 사회는 묵묵함을 기본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냉정한 곳이었다. 꾸준히 한 직장을 꾸역꾸역 참으며 일하는 것은 어리석다 하고, 열심히 하는 것은 기본이며 잘하고 못 하고가 그 사람의 척도가 되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칭찬하지 않았다. 사람들 곁에서 대문자 E 행세를 하며 동시에 성과를 내는 사람이 인정과 성과금을 독차지해 갔다. 심지어 나조차 그랬다. 교실에서 공부를 잘하는 그룹과 못 하는 그룹에 집중할 뿐, 그 가운데서 묵묵히 해야 하는 일을 소화해 가는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칭찬이나 인정을 주지 않았다. 사회에서 보통의 나도, 교실에서 보통의 아이들도, 그렇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스포트라이트가 없었다.
사람들이 한 분야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평지와 오르막길이 반복되는 계단과 같다고 한다. 지금 상승하는 누군가도 결국 멈추어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길고 긴 평지를 걸어야 하며, 묵묵하게 큰 기쁨도 슬픔도 없이 하던 일을 이어가야 하는 기간이 온다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평지를 지나는 그날들이 누군가에게는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그날들이 모여 보통의 아들과 보통의 아버지를 만들 것이다.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보통의 사람들이 언제가 올지 모를 오르막길을 기다리며, 혹은 딱히 그런 기대감 없이 묵묵히 걸으며 이력서에 근속 경력 기간을 늘릴 것이다. 누구보다 묵묵하게. 누구보다 끈기 있게. 누구보다 많은 것들을 참아내며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보통의 사람들끼리는 서로 넘치도록 칭찬하자. 오늘도 묵묵했다고. 오늘도 끈기 있었다고. 오늘도 잘 참았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기 계발서의 작가가 되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