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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게 Apr 23. 2023

묵직하게 읽기,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당신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세계문학_01



       

* 책의 내용과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





   여기 두 사람이 있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형제 같은 친구다. 두 친구 중 당신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일까.




   두 청년의 이름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다. 나르치스는 고결한 청년이며 골드문트는 방탕한 청년이다. 한 사람은 영원한 진리를 찾아 깨우치는 데에 삶을 바치고, 다른 한 사람은 지독한 공포와 어둠 속에서 잠깐 스치는 낭만과 짧은 생의 감각에 집중하며 누구보다 뜨겁게 산다. 나르치스는 철학자요 골드문트는 예술가이다. 나르치스는 이성적이고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며 골드문트는 쾌락적이고 자연적인 삶을 추구한다. 나르치스는 존경과 경외를 한 몸에 받으며 화초처럼 늙어가고, 골드문트는 충분히 늙어보기 전에 벼락 맞은 나무처럼 죽는다. 떠돌이는 수도승의 품에 안겨, 예술가는 철학자의 품에 안겨 죽는다.




   골드문트는 뚜껑이 달린 물감이다. 그는 자연의 소소한 경이에서 욕정과 상실, 고통,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색들을 끊임없이 탐닉하여 자신의 통 안에 채우고 뚜껑을 닫는다. 그렇게 담아낸 색들과 형상들을 물감 삼아 작품으로 재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한다. 물감을 채우기 위해 방랑 생활을 하고 수도원의 안정과 질서 속에 담아낸 물감을 모두 쏟아부어 작품을 만든다. 따라서 그는 방랑만을 할 수도, 한 곳에 안주하고만 있을 수도 없다. 물감이 차오르면 창작을 위해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창작 후에 물감이 비어 버리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물감에의 갈증에 시달리다 다시 방랑길에 오를 수밖에 없다. 그가 그토록 원하는 신비를 위해서. 분열하고 대립하는 양면적인 것들의 화합에 자리하는 신비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 꿈과 최고의 예술 작품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그것은 다름 아닌 신비였다. (중략)

달리 통합될 수 없는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대립물이 이 신비의 형상 속에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그 신비는 탄생과 죽음, 자비와 공포, 생명과 소멸을 동시에 포용하고 있었다.”

-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번역 임홍배




   나르치스는 안전한 성벽 안의 수도승이다. 스스로 나서서 자연과 삶을 마주하기보다는 골드문트라는 창을 들여다보며 의미를 발견하고 깨우침이 친구 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다. 그의 감정과 혼란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가 자신의 본성에 직면하도록 몰아세우고, 방랑의 기간을 통찰하여 무엇이든 단 하나의 의미로 축약될 수 있도록 돕는다. 친구를 고통 속에 밀어 넣어 스스로 알을 깨게 하고는 이내 죄책감에 짓눌리는 그의 모습은 우월하고 성숙한 고행자의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결국 이 책의 마지막에는 외려 골드문트의 질문에 불타는 갈등을 영원히 품게 되는 존재로 남겨진다.





" 이제 환자는 다시 한번 눈을 뜨더니 친구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는 친구에게 눈으로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듯한 동작을 취하면서 이렇게 속삭였다.

 「 그런데 나르치스, 자네는 나중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작정인가? 자네한테는 어머니도 없잖아?

어머니가 없이는 사랑을 할 수가 없는 법일세. 어머니가 안 계시면 죽을 수도 없어. 」

그 뒤에 중얼거린 내용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지막 이틀 동안 나르치스는 밤낮없이 친구의 병상에 붙어 앉아 친구의 생명이 사그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골드문트의 마지막 말은 그의 가슴속에서 불처럼 타올랐다.”




   골드문트의 마지막 말에서 '어머니'가 상징하는 건 일반적인 사랑과 헌신의 의미가 아니다. 골드문트의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그와 아버지를 두고 사랑과 자유를 찾아 집을 나간 존재로, 나르치스가 살고 있는 아버지의 세계와는 대립적인 세계에 속한 존재이다. 즉, 외려 여기서 '어머니'는 방랑과 자유, 감각에 의한 탐닉과 형상,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소멸과 죽음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죽음조차 음미하는 골드문트가 이성과 안전, 정신과 질서, 철학과 신앙의 세계 속에 정통한 나르치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쪽의 세계에서도 이토록 열렬하게 죽음조차 호기심을 가지며 순응할 수 있는지를. 이쪽 세계에서만큼 그쪽 세계에서도 사랑이 뜨거운지를. 과연 당신은 사랑 없이 의연하게 죽을 수 있는지를. 이 물음에 당신도 그럴 수 있는지 대답해 보았으면 좋겠다.




   헤세는 이전 작품인 「황야의 이리」에서 스스로를 분열하여 바라보는 것은 특수한 영혼만이 가지는 특성이며, 동시에 그렇게 분열하여 보는 것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전작의 인물인 하리 할러가 허구 세상의 간접 경험을 통해 자신의 도덕성을 해체하고 분열되어 있던 자아의 합일점을 찾았던 것과는 다르게, 이 책의 골드문트는 마지막까지 두 세계를 오고 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게는 하리 할러처럼 합일점을 찾은 자아가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상태에 잠시 이르는 수단이 있으니, 그 수단이 바로 예술이다. 자신이 겪은 삶의 색들을 통합하여 양면성이 깃든 작품을 세상에 던짐으로써 그는 잠시 잠깐의 만족을 느낄 뿐이다. 전작에서 환상적으로 합일점을 찾은 것에 비한다면, 보다 소박하다고도, 보다 현실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에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대체 불가능 한 것일까? (중략) 가정을 지키고 사느라 자유와 아슬아슬한 모험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메마르지도 않은 그런 사람은 없는 것일까? (중략)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이 되기에 골드문트는 자신과 자신의 예술을 풍요롭게 해주는 분열을 사랑하였고, 그가 생각하는 어머니의 세계에 깊이 자리 잡은 인물이었다.




   작가와 저서와 그 속에 인물들까지 모두 다 한없이 매력적이다. 날카로운 러시아 문학이 사람을 설레게 한다면, 독일 문학은, 헤세의 문학은 침착하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조심스럽게 가늠하며 읽게 한다. 그의 문학을 읽고 나면 나는, 내 속내는, 읽기 전과 분명하게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명인이 만든 책이라는 형태의 묵직한 예술품은 그렇게 기어코 사람을 안에서부터 바꿔 놓는다. 이 또한 골드문트가 꽃 한 송이를 끊어 줄기에 담긴 연두색의 스펙트럼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참으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얼마만큼 어머니의 세계에 가까운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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