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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게 Jul 24. 2024

선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가볍지 않다는 것에 대한 안도_07





체코에는 카프카만큼이나 아주 유명한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가 있다. 보통 고착된 인물들을 사용해 얼마나 존재의 가치가 가벼운지, 큰 사회 격동 앞에서 개인이 쌓은 정체성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주는 작가이다. 그의 저서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농담을 읽으면 고구마를 잔뜩 먹은 것처럼 답답해지기 마련인데, 프라하의 봄 그 한 철에는 그렇게 인간의 가치가 한없이 가벼웠다고 한다.


프라하의 봄 : 2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의 민주화 운동,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시간적 배경




스물일곱의 나에게 세상은 한없이 아름다웠기에 쿤데라의 이야기는 실망스러웠다.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볍다니 구시대적 발상이며 그 당시에만 국한된 이념의 부산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총알 하나에 쌓아온 모든 것들이 사라질 수 있었던, 한 개인의 가치가 어느 단 하나의 이념으로 포장되어 처분받았던 그 시절은 지나갔으니까. 작가는 그다음의 이야기를, 그러니까 존재가 얼마나 무거워질 수 있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쿤데라는 내게 시대를 관통하지 못했던 큰 감흥 없는 작가로 기억되었다.




오늘까지는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가벼워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다.




초등학교 6학년 교실, 3교시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 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가 아이들에게 말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꽁으로는 그 어떤 것도 받아서는 안 되고 주어서도 안된다고 말이다. 남녀는 늘 서로에게 긴 거리를 두며 어른은 늘 의심해야 하고 이웃은 늘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같은 날, 점심시간, 역시 초등학교 교실. 평소 간식을 참 좋아하는 녀석이 친구들에게 자기 간식을 나눠주고 있다. 야, 그걸 왜 주냐? 라고 묻자 맛있자나요 라고 말한다. 특별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친구들도 나와 같이 맛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냥 한없이 단순한 선의에 선행이다. 간식을 받아먹은 친구들 중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젤리를 준 친구나 받은 친구나 즐겁게도 맛있어한다. 강사의 가르침에 따르면, 간식을 준 친구나 받은 친구나 잘못이다.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럴 때는 또 말을 참 안 들어서 다행이네.




어른들이 아이들을 홀로 외톨이처럼 자라게 만드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의심과 무심이 일상이 되어 버린 사회를 만든 것은 어른의 탓이며, 역시 의심과 무심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명백히 어른의 잘못이다. 선의와 선행의 가치를 가르쳐야 할 때 단절과 고립이 옳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만든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지 궁금하다면, 멀리 가늠할 필요도 없이 지금 주변을 둘러보자.




길을 가다 쓰러진 사람이 있어 심폐소생술을 반복해 사람을 살린다. 살아난 사람은 자신의 몸을 만졌다는 혐의로 성추행범으로 몰아 살려준 이를 고소하고 합의금을 받는다. 힘들게 일해 빚을 갚고 겨우 몇 푼 남은 돈마저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부한다. 사람들은 기부금의 액수가 너무 적다며 기부자를 탓하고 그 정도 액수를 기부할 거면 차라리 하지 말라고 헐뜯는다. 업계의 근무 경력이 보다 많은 이가 하는 조언은 꼰대와 틀딱, 딸피 소리라 혐오하고, 동시에 이제 갓 신입으로 들어와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는 빛나는 얼굴에 대고 고경력자들은 그건 당연하고 잘해야 한다며 다짐과 포부조차 비하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너무나도 손쉽게 타인의 선의와 선행을 재단하고 평가하며 절하한다. 선의와 선행은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부질없고 무가치하며 위험한 일이 된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 되고 만다.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나를 도와준 이에게 감사하고, 남을 돕는 이를 칭찬하며, 먼저 경험한 이의 조언을 다른 쪽 귀로 흘리지 않고, 이제 갓 시작한 이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것. 그렇게 힘든 일일까. 결과와 과정이야 어떻든 선의는 선의가 아닌가. 왜 동의와 동참의 반대말이 비난과 비하가 되었냐 말이다. 전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후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직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대가 없는 선행과 선의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머리보다 손과 발이 먼저 가 도와주는 민첩한 이들 덕분에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차갑고 무채색이 되어 버린 사회에 유채색의 붓질을 하는 사람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의 가치를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 어른들로 아이들이 자라고, 그런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심과 무심보다 배려와 감사를 품고 행동하는 어른들로 가득한, 가볍지 않은 세상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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