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이라는 오만, 나만 잘났다는 자만

by Lali Whale

지난주에 남편과 닭갈비 집에 갔다. 우리는 대체로 2인분을 다 못 먹기 때문에 음식을 먹기 전에 챙겨간 반찬통에 미리 담아놓는다. 남편이 나무 주걱으로 반찬통에 닭갈비를 담는데 반찬통 입구 주변에 양념이 잔뜩 묻었다. 그렇게 뚜껑을 닫으면 고무패킹에 양념이 묻어 세척이 어렵기 때문에 확 짜증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는 분노가 입으로는 비난이 콸콸 쏟아지고 말았다. 그리고 앗차. 남편의 얼굴이 심히 뾰로통해져 있었다. 잘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화가 나면 며칠간 자기만의 세계에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꺼내와야 한다. 나는 바로 바짝 엎드려 사과하고 남편을 달랬다. 나의 정당하지 않은 분노에 대해 남 탓을 하지 않고 바로 사과하는 것이 전과는 다른 나의 대처방식이다.


그렇다.

음료나 음식물을 흘린다고 상대를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심지어 그것은 아주 염치없는 행동이다.


왜냐?


남편이 닭갈비 양념을 반찬통 따위에 묻혔다고 화를 낸 바로 그날! 나는 고가의 맥북에 대추차를 엎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추차를 머금은 delete키가 이전의 경쾌한 터치감을 잃고 찐득 거리고 있다 ㅠㅠ) 그뿐인가. 재작년 겨울, 라지 사이즈 라떼를 자동차 컵홀더와 콘솔박스 그리고 남편의 허벅지에 몽땅 쏟았다. 이런 주제에 내가 누가 누굴 비난할 수 있겠는가.

물론, 고의가 아닌 실수로 저지른 일에 대해 상대를 비난하는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숨길 수가 없다. 이전의 나는 실수가 잦은 사람이 아니었고, 질질 흘리는 것을 세상 무엇보다 혐오했다. 그 때의 나는 평생 실수 하지 않을 것처럼 자만했다. 하지만 내가 반복해서 대형 사고를 치면서 내 손이 오징어 발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전보다 분명 겸손해졌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데 감정은 전과같이 올라오는 오류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어제는 친구와 왜 우리는 상담을 수년씩 끌고가지 못할까 막장토론을 했다.


나는 장기상담을 추천하지 않는다. 상담도 병원처럼 증상이 있을 때 방문해서 그 증상을 치료하고 줄이는 것, 증상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용하기를 권한다. 증상의 변화에 있어, 오래 지속되었던 생활습관이나 생각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는 상대적으로 상담의 기간이 길어질 수 있겠으나 가능한 어느 정도 훈습이 되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내 삶에서 그렇듯 내담자의 삶도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질 힘이 있는 독립적인 삶이길 바라는 마음도 영향을 준 것 같다. 상담의 목적은 상담 안에서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상담 밖, 내담자들의 삶 속에서 잘 지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담 밖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작업을 잘하려고 노력한다.


(나와 비슷한 내 친구는 심지어 더 오겠다는 내담자를 더 안와도 된다고 종결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상담비로 차라리 당신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쓰라고 말했단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상담 방식을 유료 상담센터의 원장님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내담자가 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게 누구든 가능한 길게 상담을 이어가는 상담자가 가장 유능한 상담자요 최고의 직원인 것이다. 실제 잘되는 센터의 원장님들은 내담자들을 길게 이어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렇기에 어떤 상담실은 각 상담사 별로 그들의 내담자 수와 상담 횟수가 보험회사 사무실처럼 도표로 벽에 붙여놓고 실적을 비교한다고 한다. (그런 센터를 피하라고 우리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기도...) 대기업 상담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누가 몇 사례를 얼마나 오래 했는가가 상담사의 고가에 크게 반영된다는 것이다.


난 대체로 3~6개월, 길면 1~2년, 극 소수의 장기사례를 가지고 있다. 실제 목표한 변화를 이룬 내담자가 많기에 상담 만족도가 높고 무엇보다 항의를 거의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상담의 팬은 없다. 다들 아주 자율적으로 상담의 목표를 정하고, 이루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리고 원장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치와 지식에 맞게 상담하는 것이 나의 직업윤리다. 그리고 그런 나를 윤리적이라고 믿었다.


대~충 능력 때문이라기보다 나의 직업윤리가 상담사례를 장기로 가져가지 못한다고 결론 내리며 훈훈하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는 윤리적이야'라는 우월감을 명품백처럼 가지며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나는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특정 부분의 윤리적 강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상담하라고 가르쳤던 정규직 교수님의 가식에 치를 떨었던 내가 경제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상담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모순이 있다. (제일 돈은 많이 버시면서 점심 밥값도 더럽게 가난한 대학원생의 주머니에서 가져가셨다. 물론 모든 교수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돈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이 일을 할까?라고 하면 절대 NO이다. 나는 나의 시간과 전문적 서비스를 대가 없이 제공할 만큼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다. 또, 내 사업을 하지 않고 돈에 쪼들리지 않으면서 누군가의 생존전략을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여하튼 센터가 생존해야 어떤 종류의 서비스든 제공이 될 테고 나 같은 상담사도 돈을 벌고 상담을 지속할 수 있다.


또한 내 방식이 옳다는 과학적 근거 역시 없다.


나는 장기 상담을 많이 하는 원장님들의 상담을 직관하지 않았고, 내 상담이 다른 상담방식보다 효율적이라는 충분한 비교 데이터 역시 없다. 다만 사례를 오래 이어가기 위해 내담자를 이용하지는 않겠다는 고집을 '윤리적'이라고 퉁칠 수 없다. 그저 그 부분만큼에 대해 윤리적 강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집 전체가 깨끗하지 않지만 강박적으로 반찬통 뚜껑의 고무 패킹을 빼서 매번 세척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재작년에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의 <야망계급론>을 읽었다. 기억에 남는 부분이 윤리적 소비라는 것도 경제적 수준이 받쳐줘야 가능하기에, 스스로를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일종의 계급의식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내가 훌륭한 사람이어서 환경을 생각하고 동물을 사랑한다고 자만했지만 실은 유물론적 혜택의 차별적 이득을 받은 계급이기에 그런 생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이토록 복잡하다. 그냥 괜찮은 사람이라고 나를 믿기에 그 장벽이 너무나 많다.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화가 나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나에게 남편은 평생 관대하겠다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약속을 했다. 닭갈비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덜 풀어진 남편에게 맛도리 커피를 한 잔 사주었다. 그리고 기분이 쾌활해진 남편님에게 말했다.


"평생 관대하겠다던 그 약속은 어디로 간 것이냐? 평생 나만 사랑한다더니!"

"사랑하니까 이 정도인겨!"


잘 나지도 않았고 윤리적이지도 않은데 나만 특별하게 훌륭한 줄 아는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고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말아야지, 불쑥 짜증 내지 말아야지, 통제하지 말아야지 라며 나는 오늘도 자기반성을 한다. 문제는 반성만 하고 변화가 매~우 더디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남편이 못 바꾸니 그냥 살라고 자신은 그런 나도 괜찮단다. 뭐. 나도 이 정도의 나도 괜찮다.



오늘의 감사.

훌륭하지 않아도 윤리적이지 않아도 불쑥 화는 좀 내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오징어 발같은 손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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