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대하지 않는 직장에서 자유롭게 일하기

by Lali Whale

2월부터 새로운 직장에서 추가로 일을 시작했다. 디드어 남들처럼 주5일 근무체제!(라고 하지만 아직 케이스가 차지않아 주3~4일 나간다)


이번에는 상담 만하는 곳이 아닌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의 상담사로 취직을 했다.


처음 갔을 때,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골방 같은 곳에 서류는 켜켜이 쌓여있고 책상은 지저분했으며 몽당연필이 굴러다녔다. 4차 혁명시대에 책상 위에 자리만 차지하는 데스크탑 모니터는 사용이 불가능한 것이었고 의자는 목받침이 없어 무심결에 기댔다가는 목이 270도로 꺾였다. 나는 상담 중인데 다른 직원들이 퇴근하며 난방을 끄는 바람에 마지막 상담 끝무렵에는 턱이 굳어서 말더듬이처럼 덜덜 거렸다. 내 개인용품을 둘 서랍도 없었다. 결국 당일 상담한 내담자 파일을 어디도 둘 곳이 없어 원장님께 맡기고 와야 했다. 참고로 파일도 없었다.


(최근 재밌게 본 넷플릭스 드라마 <사건수사대 Q>가 생각났다. 비범하지만 자기 마음대로인 형사 칼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버려진 팀을 맡게 된다. 그가 처음 사무실에 들었는데 안 쓰는 지하실 샤워실에 팻말만 붙여 놓은 곳이었다. 거기서도 컴퓨터를 지원해주지 않아 칼이 상사의 방에 쳐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ㅋㅋ)


하지만 병원은 인산인해였다. 월말에 은행 대기실에 있는 듯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와 가족들로 북적북적했다. 이래서 의느님 의느님 하는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의느님 '한 분'에 간호사가 언뜻 보기에도 3~4명, 나 이외에 다른 사무실에서 상담을 하는 상담사가 한 명 더 있었지만, 첫눈에 봐도 모두 들러리였다. 유재석과 나머지 추종자처럼 모든 것은 의사인 원장님을 위한 원장님에 의한 원장님의 병원이었다. 파일을 맡기기 위해 들어간 원장님 방은 넓고 따뜻했으며 초록초록한 화분들과 창문, 공기청정기 다양한 수납공간과 그 흔한 컴퓨터도 당연히 있었다.


병원에서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시스템은 형편없었다. 상담실의 조악한 컨디션이 그랬고, 사례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최소한의 시스템이 없었고, 무엇보다 상담사 급여가 낮았다. 환자에게 제시되는 상담비 자체가 낮으니 상담사의 급여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비용은 그 가치에 맞게 설계되는 법이니, 나의 가치가 무엇인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환자들 마인드도 비용이 적어서인지 단기간에 큰 효과를 얻겠다는 기대가 적어 보였다. 이곳의 환자들은 몇 년씩도 그냥 이어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 내가 들은 거의 유일한 인수인계였다. 예상컨대 예약을 하고 와도 1~2시간은 그냥 기다려야 한다는 불만의 리뷰가 포털 사이트에 잔뜩 있었다. 어쩌면 대기하는 동안 '옜다~ 기다리기만 하느니 상담이라도 받아라!' 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끼워 팔기?


그에 비해 분당 센터는 과분할 정도로 훌륭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맞이한 창고형 골방을 보고 나니 급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편리하고 안전하게 쓸 수 있는 고객관리프로그램이 있었고 (그 말은 각 방에 개인 데스크톱이 있는 의미!) 내 방에는 방음시설과 시스템 개별냉난방기가 있어 데스크 직원이 퇴근을 해도 덜덜 떨 필요가 없었다. 나의 개인 서랍장이 있어 사무실용 슬리퍼와 상담자료등을 보관할 수 있었고 상담사례 파일을 실장님들이 따로 보관해 주었다. 처음에는 전 직장과 비교해 창문이 없어 불만이었는데 그깟 것은 불만 축에도 못 드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 불황에 과감한 투자로 새로운 상담센터를 오픈한 원장님은 경영난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을 것이 안 봐도 훤했다. 나 역시 정직원이 아닌 자유용역으로 내가 일한 시간만큼만 돈을 받는 직원이라 일이 줄어들면 수입이 같이 줄었고 상담급여는 조울증 환자의 기분보다 더 심하게 요동쳤다. 뿐만 아니라 상담비가 높으면 내담자들이 돈이 없다는 하소연을 꽤 많이들 한다. 어쩌라는 것인지... ㅠㅠ. 심지어 이곳은 주변 상담센터 대비 평균가격 인데도 그렇다.


적어도 새로운 직장에서는 그 하소연과 부담은 없을 듯하다! 그러니 사장님의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인한 압박이나 비용대비 기대를 높게 가지고 있는 내담자의 요구를 맞춰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덜 받을 것이다.


물론. 무려 15년도 전의 경험이지만 미국에서 일할 때는 상담 일에 대한 가치와 상담사에 대한 대우가 이 보다 훨씬 좋았다. 상담 서비스가 의료보험이 된다는 것 만 보아도 상담에 대한 가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보는지 알 수 있다. 그 과거에도 상담자료의 보관이 굉장히 엄격해서 처음 상담실에 일할 때 보관장 열쇠만 두 개를 받았다. 하나는 실제 보관장에 달린 자물쇠의 열쇠고 하나는 그 열쇠를 보관하는 금고의 열쇠였다. 컴퓨터에 등록하는 사례기록은 비밀번호로를 이중으로 막아놔야 했다. 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곳은 학교 정도이고, 엄격히 유료의 전문서비스라는 인식이 확실했다. 상담사에 대한 인식이 달랐고, 그들의 프라이드도 높았다. 그러니, 일에 대한 상담사에 대한 전문성과 기대도 높았다. 그러니 영어를 현지인처럼 하지 못하는 대학원생인 나는 돈도 안 받는 실습생이었음에도 그 스트레스가 진짜 어마어마했다.


기대가 크고 대우가 좋을수록 책임감과 스트레스 레벨은 높아진다. 책임감과 능력이 연봉에 따라간다는 것에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거다. 받은 만큼 일하는 기꺼운 책임감이 능력과 함께 레벨 업! 한다! 그러니 그 기대를 채우기 위한 스트레스는 사라질 수 없다.


첫 근무를 마치고 남편에게 골방에 좌천된 20년 차 상담사의 비참한 직무환경에 대해 얘기했다.

남편 왈


너무 좋은데. 난 아무도 나를 신경 안 쓰는 게 제일 좋아.


중이 되었어야 할 사람인데... 아침잠이 많아서 속세에 있는 우리 남편...ㅠㅠ


그럼에도 공감이 갔다. 페이가 적은 것은 심히 안타까우나 직원에 대한 기대가 적으면 참견도 적을 테니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상담이라는 일을, 상담사를 중요하게 보지 않아 창고같은 방에서 적은 임금으로 일을 맡기는 곳! 책임은 있으나 고용주의 기대를 채워야하는 스트레스는 적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일에는 득과 실이 있다.


그곳에서는 나의 자유도가 높아진다. 내가 어떻게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완벽한 테트리스처럼 꽉 차있는 사례를 원했고,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 요구를 채워주리라 기대한다. 나는 얼마를 받든 일을 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직업윤리와 전문성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할 것은 분명하다. 융통성이 없는 사람인지라..


내가 원한 것은 출근하고 퇴근할 때까지 끊임없이 기계처럼 일하는 것 아니었던가?


물론 충격반전으로 나를 신경 쓰고 통제하려 한다면? 잃을게 상대적으로 적기에 쿨하게 관두면 되겠다!


사실 벌써부터 남편과 누구든 먼저 한 명이 실업자가 되면 이탈리아로 자유여행을 떠나자고 약속했다. 남편이 페이닥으로 일하는 동물병원도 작년 하반기부터 근방에 대형 24시 동물병원이 2군데나 더 생기면서 경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가 일하는 상담센터도 내담자가 수가 확 줄었고 느는 것이라곤 괘씸하게 내가 추매 하지 않은 하이닉스와 삼성, 현차의 주가뿐이다. 자유롭게 들꽃이 만발한 돌로미티도 가고 엘레나 피렌체의 <나의 눈부신 친구>의 배경이 된 밀라노도 가고 싶다. 효자 아들은 자신이 집을 볼 테니 언제든 둘이 함께 가라고 섬광처럼 눈을 번뜩였다. 자기만 두고 가라고 하니 그게 최고의 위험요소라 엄마에게 우리 둘 중에 한 명이 잘리면 유럽여행을 가기로 했으니 엄마가 우리 집에서 아들 좀 봐달고 했다. 미친 소리를 하고 있다면서 자신은 절대 네 아들은 못 봐준다며 쐐기를 박았다. 설에 시댁에 가면 시엄니에게라도 기대 봐야 할 것 같다. ㅋㅋ

텐트 밖은 유럽-로맨틱 이탈리아 편 (tvN)

난 우리가 자유로운 실업자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감사합니다!

일이 있어 침대를 벗어나 운동도 하고 돈도 벌고 머리도 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언제 그만둬도 함께 여행갈 친구가 있어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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