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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꿈을 꾼다는 것은

꿈은 원래 이루는 게 아니라 꾸라고 있는 것

by Lali Whale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미라


51살의 시몬 드 보부아르가 이십 대가 보는 자신을 일컬어 한 말이다. 3년 전에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릭 와이어 지음)를 읽으며 왜 그런지 몰라도 13장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과 14장 몽테뉴처럼 죽는 법은 읽지 않았다. 언제가 읽고 싶어 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가 온 것이다. 카이로스!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바로 그때인 것이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줄곧 내가 늙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도전하고 싶은 생각도 나에 대해 가졌던 무한한 신뢰도 자고 나면 솟아나던 호기심도 어느새 다 말라 버린 것 같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고 매일 가던 산책길을 돌고 삶의 이벤트를 충실히 반복했다. 좋아하던 영어를 다시 공부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가도 '이 나이에 영어는 다시 해서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다. 다시 소설 공모전에 도전해 볼까 하다가도 어차피 재능도 없는데 계속해서 뭐 하나 싶어 한동안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성과와 인정이 없어도 내가 좋아하면 그뿐이라는 신념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맞아? 성과와 인정을 더 원했던 거 아냐?'라는 생각에 흔들렸다.


나 역시 45살에 이미 죽어 버린 미라가 된 것 같았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 에릭 와이너는 늙어가는 법을 쓰면서 반복해서 "나는 늙지 않았다."라고 적으며 자신이 늙었음을 역설했다. 그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은 이미 늙었고 우리는 늙을 것이고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가능하다면 과거를 수용하고, 친구를 사귀며, 남을 신경 쓰지 말고, 호기심을 간직하고, 내 삶의 프로젝트를 추구하고, 건설적으로 물러나 다음 세대에 자리를 남겨주라고 잘 늙는 법을 충고한다.

근데 난 진짜 늙었나?


지난주까지 메리 앤 섀퍼와 애니 베로스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을 읽었다. 5년째 이어오는 독서클럽에서 내가 선정한 책이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른 채, 저자인 메리 앤 섀퍼가 70이 넘어 쓴 책으로 마지막을 다 쓰지 못하고 죽게 되어 조카인 애니 베로스에게 마무리를 부탁하여 완결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소개글을 보고 손이 갔다. 매리 앤 섀퍼는 죽기 전에 출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쓰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완벽주의자였거나 진성의 환경주의자였지 싶다.) 그래서 벼르고 벼른 칼을 인생 마지막 순간 드디어 휘두른 것이다. 안타깝게 꿈은 생전에는 이루지 못하고 꿈만 꾸다가 돌아가셨다.

출처. 밀리의 서재 책소개에서 가져옴


궁금했다.

도대체 메리 할머니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칠순이 넘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죽기 살기로 책을 쓰고 완결도 못하고 성공의 세리머니도 맛보지 못한 채 죽었다. 이거 뭐, 살아계셨어야 이런저런 소감도 듣고 도전의 의미도 찾아볼 텐데 인생의 마침표가 책의 마침표보다 일찍 찍히니 알 수가 없다. 젠장할이다. 내가 그녀라면 관속에서도 통곡했을 것 같다.


그렇게 읽게 된 그녀의 책은 음... 참으로 재기 발랄했다. 도대체 칠순의 할머니가 죽기 전에 무슨 책을 쓰셨나? 한번 보자 하는 마음이 컸다. 참 못됐다. 그런데 그랬다. 저자가 이 책을 쓰면서 참 신났구나, 재밌었구나, 푹 빠져 들어있었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일하게 독일에 점령되었던 영국의 영토인 채널제도의 건지섬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나간 이야기를 런던의 작가인 줄리엣의 시선을 통해 그리고 있다. 전체가 편지글로 되어있어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너무 헛갈려서 영화의 도움을 받았다. 이미 영화화되어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람은 줄리엣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건지섬의 용맹하고 정의로운 엘리자베스인데, 나는 여튼 줄리엣이 좋았다. 호기심으로 사람들에게 편지를 건네고 독서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배를 타고 그들을 찾아가는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을 좋아하고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고 끊임없이 꿈을 꾸고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줄리엣이 아마도 칠순의 메리 할머니 같았다. 작가의 글을 보니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었지만, 하필 독서클럽에 대한 책을 토론하는 날 총 10명 중 3명이 모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이가 들어 꿈을 꾸는 것에 대한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중에 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신 멤버 한 분이 우리는 구체적으로 목표를 정해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것이 가치 있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실제 살아보니 꼭 그렇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그랬다. 나의 10대에도 20대에도, 꿈은 꾸는 것보다 이루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교육받았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통장에 쏴져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꿈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때 4강의 신화를 이룬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표어가 있다. 바로!

꿈은 이루어진다.
출처: 매니아타임스 (https://www.maniareport.com/view.php?ud=2022112106003495325e8e941087_19)


이 응원구호처럼 그 시대의 우리를 잘 표현하는 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꿈은 그냥 꾸기만 해서는 안된다.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열광했고 함께 축하했고 밤이 새도록 기쁨의 축배를 들었다.


꿈은 정말 그런 걸까?

맞다고 진짜 그런 거라고 어깨가 축 처져있을 때, 메리 할머니가 와서 나를 툭 칠 것 같다.


나 봐! 꿈은 꾸기만 해도 신난다고!


그러니까 나는 내가 배운 교육, 사회적 기대를 박살 내 버려야 한다. 목표를 세우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고, 꿈을 꼭 밖으로 꺼내 이루지 않아도 된다고 반복해서 외쳐야 한다. 그냥 ‘머리가 큰 7살 아이처럼‘ 꿈꾸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노년에 대한 보부아르의 두려움은 점점 흐릿해지다 고요한 수용, 심지어 즐거움으로 바뀐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훌륭하게 나이 들었다고.


NO! 나는 아직 늙지 않았다.

아직 고요하게 수용하고 건설적으로 물러나 다음 세대에 자리를 내어줄 수가 없다. 지난주 남편과의 경제 회의에서도 우리는 최소 향후 10년 간은 집중노동기간을 가져야 한다며 나의 다이어리에 뿌리박아 적어놓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제는 꿈을 성취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꿈을 꾸는 과정으로 즐겨야겠다.

꿈은 원래 이루는 것이 아닌 꾸는 것이니 말이다.



화요일의 감사

- 꿈꾸는 의미를 다시 되새겨 주신 매리 앤 섀퍼드 작가에게 감사를! Rest in Fun!

- 꿈을 꾸고 있는 모든 동지들에게 찬사를!

- 오랜만에 다시 글을 썼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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