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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뚜기 Dec 21. 2023

이 세상에 우아한 직장은 없다.  part 1

악마가 프라다를 입던, 미생이 완생이 되든 직장생활은 힘들다

1995년 1월에 직장이라는 곳에 처음 출근했다.

나름 잘 나가는 대기업이었다. 제조업이었지만, 자금이 탄탄해서 절대 망할 일 없는? 그런 회사였고 직원은 한 500명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부산에 본사가 있던 그 회사는 제2의 공장을 충북 음성에 지으면서 확장을 하는 시기였기에 제법 많은 신입사원을 뽑았었다. 나는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입사시험을 쳤었고, 그때 아마도 지원자들이 꽤 많았던 것 같았다. (경쟁률이 10대 1 정도라고 뻥을 치고 싶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아무튼 교실 몇 개를 빌려서 시험을 쳤던 것 같다.) 아무 준비 없이 갔던 입사시험에 갑자기 영어테스트를 한다고 해서 심히 긴장했었는데, 몇 달 다녔던 학원경험으로 무사히 테스트를 통과했었다.


사실 나는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선생님이 되면 방학 때 쉬면서도 월급을 받는 안정된 꿀 직장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임용고시는 예나 지금이나 경쟁률이 치열했기에 시험준비를 아주 열심히 해야 했다. 어떤 이들은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그 당시 가난한 우리 집안에서 국립대가 아니면 대학을 갈 수 없다고 부모님이 귀에 박히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지방 국립대에서 장학금을 받지 않고서는 (그 당시 국립대에는 장학금을 상위 30%까지 주었다.)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연히 대학을 졸업하면 어디든 취직이 되어 있어야 했다.

꿈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취직하지 않으면 끝이다' 이것이 나의 내면의 메시지였다.

임용고시를 나름 열심히 준비했지만, 시험을 치러 갔는데 진짜 거의 아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시험의 방향을 내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냥 도서관에서 주야장천 관련도서들만 보았었기에 뭐가 뭔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다.

시험은 떨어졌다. 우리 과에서 같이 준비했던 그 누구도 합격하지 못했었다. 화학이라는 과목이 사실 TO도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나름 완벽주의 같은 마음이 있었다.

선생님이라는 것이 그냥 시험만 잘 쳐서 되는 것인가 사명감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임용에 떨어지고는 깨끗이 포기하고 취직준비를 했다.


그 당시에는 부산의 서면 쪽 서점에는 구직공고가 많이 있었다. 우연히 부산에 갔던 나는 거기에 붙어있는 곳 중 하나에 무작정 원서를 넣었고, 합격을 해 버린 것이었다.

시험을 치고 소식을 기다렸던 그 순간들과 집에서 입사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기쁨은 정말 가슴 뛰는 행복감이었다.

시골에 살고 있던 나는 이제 부산으로 취직을 해서 가게 되었는데, 막상 취직은 했지만 집이 없었다.


부모님은 부산에 살고 있는 친척에게 부탁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 여동생은 나의 할머니 즉, 고모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 아픈 애를 내가 어떻게 데리고 있냐?'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때부터 고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중학교 친구가 부산에서 동생과 자취를 하는 집에 한 달을 얹혀살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한 달 이후에는 잠자는 방을 얻어서 대학생 한 명과 같이 방을 쓰면서 회사에 다녔다. 그러다가 회사 직원이 충북 음성으로 이전발령을 받으면서 그 직원이 살던 좀 더 환경이 좋은 잠자는 방으로 그 대학생과 같이 옮겨서 회사를 다녔던 것 같다.

우리 젊을 때는 다들 그러고 살았었다. 보증금이 없어서 방을 구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친동생과 살게 되면서 부모님이 이리저리 돈을 모으셨는지 13평짜리 작은 아파트하나를 얻어 이사하게 되었다.

그때 당시 전세보증금은 2천만 원이었다.  



잘 나가는 대기업에서 신입사원 중 여자는 딱 2명이었다. 내가 그중의 한 명이었다.

입사하고는 사회라는 곳이 이런 곳이라는 것을 아주 잘 깨닫게 해 주었다. 신입사원들의 교육기간은 한 달이었다. 한 달 이후에는 각각 배정받은 부서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한 달 동안 회사의 전문적인 부분들과 안전, 각 부서가 하는 일 등을 교육하고 마지막에 시험도 치고 시상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비상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소위 포토그래픽 메모리였다.

뭔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오면 거의 새겨지듯이 기억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턴시험에서 1등을 했다.

나는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머리 좋은 나에게 회사가 아주 훌륭한 대접을 해 줄 줄 알았던 것 같다.


한 달의 교육이 끝나고 임직원들과 회식의 시간이 되었다.

솔직히 한 달의 교육이 끝난 후 였는지 아니면 입사하고 얼마 안 되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에게 선명한 기억은 2차로 간 회식자리 즉, 어두침침한 호텔 나이트 같은 곳에서 임원진이나 부장님들과 부르스를 춰야 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내가 왜 아버지뻘 되시는 분들과 여자라는 이유로 부르스를 쳐야 하고 같은 남자동기들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고 충격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성추행 따위는 입밖에도 꺼낼 수 없는 시절이었다.

닥치고 돈 벌어야 하는 시절이고,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망하는 것 같았다.

교육이 끝나고 동기생들끼리 회식을 하는 자리에서도 어떤 한 동기 놈이 나의 허벅지를 대놓고 쓸었었다.

술이 취했다는 핑계로 그다음 날 모두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듯 행동했다.

다른 남자동기는 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냐고 나에게 말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한 그 꽃다운 나이에 나는 그런 취급을 당하며 아무 말도 못 하고 독기를 품게 되었다.


직장생활에서 제일가기 싫은 곳이 회식자리였다.

부서를 배정받고 얼마 후에 기술부 회식이 있었고, 그때는 한부서의 부장님 옆자리만 앉으면 등을 쓰다듬는데

기술부에 있던 여직원들이 돌아가면서 그 자리에 앉아야 했던 개 같은 경우가 생각이 난다.


기술부 회식에 가면 평소 얌전했던 건축팀의 과장님은 갑자기 사자로 변신했다. (좋은 말로 사자인 것이지 그냥 소리만 지르는 불쌍한 인간이었다.)

이렇게 회식은 나에게 기피해야 할 제1순위 자리였다.

입사 2년 차가 되고 후배들이 들어왔다.

후배들도 군대를 제대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동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난 후배들과 가는 회식자리도 편치 못했다. 그래서, 가방을 버리고 도망을 나온 적도 있었다.

회식자리에 부하직원이 없어져 버린 차장님은 다음날 잔소리 폭격을 퍼부었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예욧!!’.

나의 사수는 이 말에 '연장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읊조리면서 무시해 버렸다.


사실 이런 회사에 여자들이 다니기 어렵기는 했지만, 회사의 사장님과 전무님이 다 딸들만 있어서 여직원을 뽑았다는 소문이 입사 때부터 있었다.

입사 2차 면접 때 시집 안 가고 5년 이상 회사에 다닐 수 있냐는 질문을 했었다. 나는 아무튼 그 약속을 지켰다.


대졸 공채로 들어온 나의 프라이드는 직장에서 매일 주어진 업무들로 산산이 찢겨가고 있었다.

내 업무의 대부분은 문서작성, 문서복사, 팩스 보내기, 우편물 챙기기, 커피 타기 등이었다. 우아한 특허문서 관리나 회사의 가장 중요한 개발 부분의 기밀문서 관리는 차장님이 하셨다.

지금 같으면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겠지만, 그때 당시 무슨 이유였는지 내가 영어를 잘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영어로 걸려오는 전화는 교환실에서 다 나에게 전화를 돌렸었다. 그런 전화를 받아내는 것이 긴장되었었다.

내 영어실력이 들통이 나면 안 되겠고,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겠고.

가장 괴로운 시간은 차장님의 팩스지시와 함께 오는 빨간펜 지도시간이었다.

영어로 팩스를 써보라고 지시하시고는 (그때는 인터넷도 윈속을 접속해야 겨우 할 수 있는 천리안 시대였다. 쉬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작성한 영어팩스를 빨간 펜으로 좍좍 그어버리고 자신의 문장으로 채워서 다시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난감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자존심은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다 지울 거면 시키질 말든지'


하루는 연구소의 한 직원이 찾아와 나에게 호통을 치고 간 적이 있었다.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왜 우편물을 똑바로 갖다 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회식자리에서부터 쌓여왔던 나의 독기, 입사 n연차(몇 년 차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내공으로 가둬둔 결계를 그 인간이 풀어주었다.

나는 심히 열이 받았었다. 그 직원의 이름도 얼굴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의 사규를 찾았고, 내가 해야 할 업무가 적혀 있는 페이지를 찾아서

그 연구소 부서의 부장님이 앉아 계신 자리에서 그 인간 앞에 사규를 펼쳐놓고

내 업무 어디에 우편물을 전달하라는 것이 있냐고 따지고 들었다.  

지켜보던 과장님이 나를 혼내셨고 별 소득 없이 씩씩거리며 내 부서로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소문만 파다하게 났을 것이다. '저 여자 성질 장난 아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에서 꼰대질에 자기 개인 업무까지 지독하게 시키는 상사 밑에서 버티면서 ‘Jobs paid the rent!’라는 이야기를 하며 서로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위 우리 문화로 의역하자면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된다는 소리인 것이다.


직장생활은 개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나와는 다른 고통들을 남자들은 받게 된다. 임원들의 개인 집 이사에 차출된다든지, 그 집의 벽지와 장판 작업을 위해 회사의 귀한 제품들을 들고 가서 마치 시공기사인양 주말과 주일에 그런 일들을 하고 와야 했고, 더 큰 삼*같은 대기업에서 클레임이 오면 달려가서 비위를 맞춰야 하고 그곳의 작업장까지 가서 그 클레임의 산물들을 다 처리해 줘야 하기도 했다.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 방 옆의 도서실을 자주 찾아 연구하는 것 같았던 과장님은 몇 주 후에 삼*으로 우리 회사의 모든 기밀을 다 빼돌린 적도 있었다.


우리 회사의 임원이었던 분은 내가 일하는 부서의 상무님이었고, 난 그와 같은 방에서 근무했었다.

한 번은 그의 부인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자기 남편의 불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화 오는 것을 잘 지켜보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리고, 부장님은 임원이었던 그가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그 부인이 폭행당한 얼굴로 자신에게 찾아와 어떤 S.O.S를 보냈는지 이야기해 주신 적도 있었다.


나는 '나의 아저씨'같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내용이나, '미생'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직장 찌질이들의 이야기를 5년간 종종 보아왔다.  정말 멀쩡하게 생긴 사원이 카드값을 못 막아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카드를 빌리다가 잘리기도 하고, 누구랑 누구랑 사귄다더라가 결국은 불륜이었다로 소문이 나기도 했고, 일하다가 손가락을 잘린 여직원과 IMF시절의 명퇴와 대기발령 그리고 기획부 직원이 갑자기 생산직으로 발령이 되는 등 별 일이 다 일어났다. 그래도 회사는 망하지 않았고, 그래도 회사는 따박따박 매월 정해진 날에 월급을 주었다.   



월급도 보너스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받았던 회사였다. 회식을 피한 후로는 누구도 나에게 압박을 주지 않았었다. 야근도 딱히 없는 꿀보직이었다.

나는 그런 회사를 2000년 5월 대리를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떠나려고 인사하던 그날, 회사사규를 들고 설칠 때 혼냈던 그 과장님이 마치 오빠처럼 나를 안아주었다.

"5년 넘게 고생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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